19금애니 ※ 초스피드
19금애니
19금애니 새벽에 먼동이 어둠을 밀어 하루를 여는 시간. 한국의 대표적인 부촌(富村)으로 꼽히는 강남구 청담동, 사람이 없는 골목을 따라 질주해 들 어오는 은색 스포츠카가 있었다.
대당 2억을 호가한다는 포르셰 GT2는 2차선 도로 폭의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저택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대궐 같은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자장식의 대문 앞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큰 키의 젊은 남자였다.
탄탄한 체격에 까무잡잡한 피부가 지극히 섹시 한 느낌을 풍기는 그의 얼굴은 앳된 미소년과 어른 남자의 중간쯤에 와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아래층 거실에는 환하게 불이 커져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답게 할 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일어나계신 모양이었다.
제후는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어나셨어요? 아침 일찍부터 어딜 다녀오는 게냐? 산책이요. 제후는 픽 웃으면서 신문을 보고 있는 권 회장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며칠동안 집에 들어 오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씀이 나오다니 영감 인내심도 참 대단하단 말야. 권 회장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손자의 옷차림을 살폈다.
지금 제후가 입고 있는 옷은 근사한 와인 파티에 어울리는 고급 정장이었다.
산책하는 사람 옷이 그게 뭐냐? 특이하잖아요. 두 번만 특이했다간 병원에서 호출할 거다.
그것도 괜찮죠, 한 일주일 푹 쉬다 나오면 보험료도 나올 테고. 근데 병명은 뭐가 좋을까 나 한 마디도 안 지고 말대답을 갖다 붙이는 손자였다.
권 회장은 혀를 쯧쯧 차다가 아침 준비 를 하다 말고 주방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화살을 돌려 쏘았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뭐든 오냐 오냐 해주니까 애 버릇이 저렇게 없어진 거라고. 나 참, 원망하려거든 일찍 간 당신 아들과 며느리를 원망하시구려. 제후 버릇없어진 게 어 째 내 탓이우? 좀 가르치려고 회초리 들면 말린 사람은 영감 아니었소? 제후의 낯이 몰라보게 굳어졌다.
저 올라갈게요. 쉬세요. 그 바람에 부부간의 언쟁도 그쳤다.
얘야. 됐어요. 늦게 들어와서 죄송해요. 당신 때문에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아들 내 외 얘기만 나오면 눈에 띠게 미안해하셨다.
http://agora.shenala.com 제후는 그게 싫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손자라고 특별대접을 받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사고를 치 고 경찰서를 오락가락해도 이렇다 할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두 분께 죄송하면서도 답답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야단을 맞고, 잘 한 것이 있으면 칭찬을 듣는 보통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이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온 제후는 씻지도 않고 덜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며칠 전 집에서 나갈 때 엉망 이었던 방은 언제 어지러 졌었냐는 듯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었다.
젠장. 할머니가 치우셨을 것이다.
도우미 아줌마를 시키셔도 될 일을 할머니는 연세가 꽤 드신 지 금까지도 손자 방 청소만큼은 손수 해주셨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 물고 재를 떨다가 치이익, 종이 타는 소리에 피곤한 몸을 젖혀 일어 났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할 재떨이가 보이지 않고 대신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잠이 올 듯 말 듯 몽롱한 눈에도 확 들어오는 인상이었다.
크고 동그란 눈에 귀여운 코, 핑 크색 입술이 인형 같은 여자아이였다.
얼굴은 하얗고 머리는 까맸다.
풋 예쁘네. 누군지도 모르면서 제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아이는 어른스런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기껏 해봤자 열일곱이나 될까 말까 어려 보였다.
알게 뭐야. 근데 할머니는 왜 처음 보는 여자 애 사진을 내 방에다 갖다 놓으신 거지?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테니 잠이나 자자고 제후는 팔을 침대 머리맡으로 뻗어 방 불을 껐 다.
밤을 꼴딱 새고 들어왔으니 오늘도 학교 가기는 그른 것 같다.
독립이요? 스무 개 계열사가 있는 대기업의 총수로 새벽 4시의 기상 이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할아 버지셨지만 손자와의 점심을 위해 시간은 남겨놓으셨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제후는 호출을 받고 나갔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래. 왜 싫으냐? 싫은 건 아니지만 의외의 말씀이라서요. 평생 장가도 안 보내고 옆에 끼고 사실 줄 알았 는데 말이죠. 네 할미야 그렇겠지만 나는 아니다.
녹차의 은은한 향과 맛을 음미하던 권 회장이 찻잔을 놓고 어느덧 스물넷의 나이에 이른 손 자를 바라보았다.
생전의 아들과 그의 모습을 빼닮은 귀한 혈육을. 제후야. 제후는 굳이 할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나는 네가 나를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하기에는 어렵지만 남자의 인생을 걸고 뭔가에 도전 할 만한 나이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요? 모름지기 남자란 직업적인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지해 줄 가정이 없으면 힘든 법이 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이 만큼 회사를 키울 수 있었던 건 집 안에서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 준 네 할미의 공이 컸다.
요컨대 그 말씀은 대충 짐작은 하면서도 제후는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해라. 예? 결혼이라고 했다.
네가 회사의 오너로서 자격이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너를 시험 하는 거다.
제후가 아는 한 할아버지는 농담을 모르는 분이셨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그런 손자를 보며 권 회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옛 어른의 말씀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다.
자기 몸과 가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비록 제후 네가 이 할애비의 눈 밖에 나려고 가당찮은 노력을 하고 있다만 네 놈 속은 꽉 차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만 알아서는 안 된다.
네 할미와 집안 어른 들에게 그리고 장차 네 손에 생계를 맡길 대원 그룹의 사람들에게 네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 제후야. 혹시사진 속의 그 아인가요? 권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 아비와는 대학 동문이자 막역지우가 되는 사람의 딸이다.
내가 며 칠 전에 직접 만나봤는데 아이가 나이에 비해 아주 야무지고 똑똑하더구나. 하긴 일주일에 걸쳐 신입사원들의 최종 면접을 보시는 분이 보지도 않고 그런 중요한 일을 결정하셨을 리가 없지. 제후는 일단 만나보기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벌써 결정이 난 건 가요? 그 아이는 어른들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신랑 될 사람 얼굴도 보지 않고 말이죠? 그 아이도 뭔가 생각하는 뜻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손자의 눈치를 보던 권 회장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측근을 불렀고 그는 키 하나를 놓고 나갔다.
네 거다.
청담동 본가에서 30분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빌란데 크기며 시설이 젊은 사람들 취향이라는 구나. 마음에 들면 그 아이랑 들어가 살 거라. 제가 만약 할아버지 말씀을 거절한다면요? 정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도 밀어붙이진 않을 게다.
대신에 그 때는 네 손에 쥔 키도 다른 사람의 것이 되겠지. 할아버지와 헤어진 제후는 다니는 대학으로 차를 몰았다.
놀랍게도 그의 예비 신부가 될 여 자는 같은 학교에 같은 과의 후배였다.
1학년 은 아란. 99학번 동기로 졸업을 하고 조교 일을 하는 친구에게 그녀의 이름을 대고 수업 스케줄을 물 었다.
학교 동편 경상대 건물에서 6교시 교양 수업이 마지막이란다.
시간이 좀 남았다.
유독 남자들이 많은 경상대 건물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제후는 아란을 기다렸다.
3시가 되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몇 씩 짝을 맞춰 나왔다.
커피 이후의 시간을 담배로 죽 이고 있던 제후의 눈은 여학생들만 쫓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손만 잡아 데려오면 될 거라는 제후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모두 들 비슷비슷한 긴 생머리들을 하고 있어 헷갈렸다.
여자들을 기웃거리다가 제후는 할아버지가 알려준 아란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막 현관을 나가 도서관으로 난 도로를 걷던 학생들 중에서 한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보세요? 자연스런 갈색이 풍부한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 댄다.
역광에 눈을 살짝 찌푸렸지만 사진 속의 그녀가 틀림없었다.
제후는 아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폴더를 닫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갑작스레 길을 막 은 미남자를 보며 아란을 비롯해 그녀의 친구들이 눈을 껌벅였다.
누구세요? 권 제후. 제후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아란의 손목부터 잡았다.
그리고 양 편에 선 그녀의 두 친구들 에게 말했다.
니들 말고 얘한테 볼 일이 있어. 급한 일 없으면 얘 좀 빌리자. 40분 뒤 제후와 아란은 둘이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르는 빌라에 와 있었다.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다며? 취조하는 사람 마냥 아란을 앉혀 놓고 제후는 그녀 앞을 오락가락 했다.
네. 목소리가 다소곳하다.
미리 신부 수업이라도 받았나? 어른들이 시켜서 하는 거야, 네 뜻이야? . 말을 안 하는 건 어른들 뜻이라는 거야? 네 의지는 없고. 역시 말을 안 하고 손가락을 깍지 끼어 조물조물 거린다.
너 말 할 줄 몰라? 무슨 생각으로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는지 얘기 좀 들어보자고. 그럼아란이 물끄러미 말꼬리를 뺐다.
좀 앉아볼래요? 오빠 키가 커서 쳐다보기가 힘들어요. 그래, 좋아. 제후는 정장 재킷을 벗어 테이블에 던지고 아란과 약간 떨어져서, 나란히 침대 모서리에 앉 았다.
아란이 옆얼굴을 가리고 있던 생머리를 쥐어 귀 뒤로 넘겼다.
다시 묻자. 왜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어? 도망치고 싶어서요. 도망? 사실 우리 엄마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지금 계신 분은 새 엄마구요. 아, 그래? 너도 보통 배경은 아니란 말이지. 제후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 결혼도 새 엄마가 시킨 거에요. 내 뜻은 없었어요. 안 하면 되잖아. 본인들이 맘 없다는데 설마 억지로 떠밀기야 하겠어? 아뇨, 할 거에요. 아란이 고개를 틀어 제후를 쳐다봤다.
강 건너 불구경 남 얘기 하듯 대답을 던지던 제후도 담배를 잠시 입에서 떨어뜨렸다.
혼자 살 수 없고 그 누군가 보호란 명목으로 내 곁에 있어야 한다면 새 엄마와 나에겐 관 심도 없는 아빠보다는 남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 그러게 생겨가지곤 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너. 제후는 손을 내밀어 손등으로 아란의 목덜미를 쓸었다.
하얗다, 눈이 부실 만큼. 말하자면 계약을 하자는 거야? 형식상의 부부 관계를 유지하되 상대가 무엇을 하든 상관 하지 않는? 네. 미안하지만 난 그럴 맘 없는데? 너에게는 내가 일종의 도피처에 불과할지 몰라도 난 할아 버지와 약속을 했거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통해 이 망나니 권 제후도 꽤 쓸만한 놈인 걸 보여드리겠다고. 그러자면 아이도 만들어야 할 거고 제후는 아란의 붉은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촉촉한 윤기가 흐르는 그것에 탐이 났다.
그리고 난 그걸 아주 좋아해. 아이를 만들기 위한 작업 이상의 즐거움이 있으니까. 만일 네가 나와 끝까지 계약을 맺고 싶다면 그 정도는 허락해줘야겠어. 그녀는 망설였다.
그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정도의 자유를 허락해주면 제후가 감지덕지해서 자기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아란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떡할 거야?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대신에 대신에? 내 곁에 끝까지 남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오빠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간섭하지 않 을 테니까 날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제후는 아란의 입술과 턱을 만지던 손가락을 떼어냈다.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들어오겠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뭐 있겠어. 그래. 다음 행동은 거의 충동적이었다.
잔잔한 침묵 속에서 시선이 얽혀들고 뜨거운 향기가 제후 와 아란의 입술 사이에서 오가기 시작했다.
키스가 깊어지면서 제후는 한 팔로 아란의 허리를 감싸면서 침대로 눕혔다.
이후에 어떤 일 이 있어날지 알고 있을 텐데 아란은 열에 들뜬 남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란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누워, 턱을 드는 바 람에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목덜미는 보고만 있기엔 너무 매혹적이었다.
연노랑 니트가 가슴까지 밀려올라갔다.
부드럽고 말랑한 속살에 붉은 색 흔적을 남기며 예 비 신부의 몸 맛보기에 열중하던 제후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의 벨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아씨! 한창 바쁜 데 누구야? 재킷을 뒤져 핸드폰을 꺼낸 제후가 전화를 받는 사이 발그레진 얼굴과 할딱이는 숨을 어쩌 지 못하고 일어난 아란이 구겨진 옷을 내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다.
귀여웠다.
스무 살 나이에 걸맞게 발랄한 미니스커트 아래, W자 모양으로 벌려 앉은 그녀의 다리에 다시금 제후의 시선이 맴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나 보다.
매무새를 추스르다 눈이 마주치자 다른 쪽으로 피해버리는 아 란을 보고 제후는 웃음이 나왔다.
왠지 아란과 시작할 결혼생활에 기대가 생기고 있었다.
전화를 건 할아버지에게 아란을 데려가겠다는 말을 하고 제후는 폴더를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어디로요?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러 가야지. 우리 결혼한다고. 아란이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어 맡긴다.
그 수줍은 향기를 참지 못하고 제후는 아란을 가슴 에 안아본다.
동그랗고 작은 어깨 아래로 풋풋한 내음이 나는 여자의 몸이 제후의 팔 안에서 느껴진다.
잘 해줄게. 제후는 아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한테 온 거 후회 안 하도록 아껴줄게. 아란이 제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둘만의 살림을 시작할 집에서 제후와 아 란은 따스한 빛을 받으며 오래도록 그러고 서 있었다.
열어둔 발코니 문으로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올라왔다.
뭐라고? 결혼?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래서 카페의 창가 자리에 여자와 마주앉은 남자는 곧추 선 목 소리를 듣고도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야, 권 제후! 네가 들은 게 전부야. 그 이상은 할 말 없어.제후는 이 곳에 들어와 두 개째인 담배를 뭉개어 껐다.
말도 안 돼! 너 이제 겨우 스물넷이야. 멋대로 인생 즐기기에도 모자란 어린 남자 나이 스물넷이면 어린 아이가 아니지, 정 수경. 제후는 한심하다는 듯 그런 말을 꺼낸 수경을 쳐다보며 정정했다.
여느 머저리들하고 다르게 난 군대도 지원해서 다녀왔어. 거기서는 최소한 대원 그룹 후 계자가 아닌 평범한 남자 권 제후로 대접해줬고 덕분에 제법 심각한 인생 고민도 할 수 있었지. 돈, 시간, 여자 내게 즐길만한 것은 많지만 언제까지나 이러고 살 생각은 안 했어. 너네 고리타분한 할아버지가 시켰니? 새 담배에 불을 붙이던 제후의 손이 멈칫, 했다.
말조심해. 맞구나? 내 말이 맞지? 할아버지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거지? 넌 다른 건 몰라도 할아버 지 할머니 말씀은 잘 듣는 착한 손자였으니까. 그래서 눈 밖에 날까봐 마음에도 없는 결혼 한다고 한 거지? 아니. 미안하지만 네 말이 틀렸어. 예쁘고 착하지. 생긴 거랑 다르게 반응도 빨랐고.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 제후의 입가에 짓 궂은 웃음이 올랐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눈에 거슬리는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절대 곁에 안 둬. 뭐, 집안끼리 우의를 다지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 아이랑 결혼하겠다고 한 건 내가 원해서야. 그야 처음에는 어른들 뜻이었어도 직 접 만나보니 남 주기는 아깝더라고. 수경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 정 수경. 네 눈에 그렇게 쓰여 있어. 놓치기 아까운 상대일 뿐이지 아직 마음을 허락한 것은 아니 라고. 수경도 맞담배를 피워들었다.
제후는 고즈넉한 눈길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수경을 잘라내고 달콤한 사과 향기가 날 것 같은 아란을 덧대어보고 있었다.
그 아인 담배 안 피워. 수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너처럼 진한 향수 냄새가 풍기지도 않고 안고 있으면 연한 장미향이 나. 붉은 립스틱은 바를 줄도 모르고 진한 화장은 더더욱 거리가 멀지. 요컨대 나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라서 끌렸다는 거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정 수경은 곁에 있으면 자랑스럽지만 부담스러워. 그 아인 평범하 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워. 정 수경은 혼자 있어도 당당하지만 그 아이는 가냘프고 약해서 내가 보호해 줘야 해. 제후는 아란의 첫인상을 그렇게 읊어냈다.
동정에 약간의 호감에, 그게 사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도 사랑한 건 아니지. 완벽하게 즐겼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 야. 말해봐, 정 수경 너와 나에게서 호텔과 섹스를 빼고 나면 뭐가 남는지. 제후는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나 간다.
결혼식 날짜 잡히면 청첩장 보낼게. 카운터에서, 아무 대꾸도 없이 앉아 있는 수경을 돌아보는 제후의 속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여자를 즐기되, 마음은 주지 않는 얼음왕자 권 제후가 그래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었는데 이런 식으로 헤어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었다.
대학 휴게실 카페를 나온 제후는 도서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알만한 사람 다 아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터라 지나는 학생들이 한 번씩은 그를 흘깃거리며 지나간다.
아마도 아란은 남자인 자기보다 더한 관심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아란 아란을 부르며 다가가려던 제후의 걸음이 멈춘다.
제후는 도서관 앞에서 또래의 남자와 이 야기를 하고 있는 아란을 발견했다.
남자가 뭐라고 얘기를 하자 아란은 주먹을 쥐고 가슴을 툭 치며 웃는다.
둘이 친한 사이인 지 남자는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은 아란. 설마 사귀는 사이는 아니겠지. 어쩐지 그 모습이 아니꼬운 제후였다.
은 아란! 배는 커진 목소리에 해맑은 미소는 제후에게로 향하고 아란이 끄덕 인사를 한다.
난 둘이서 기다리라고 한 기억 없는데. 제후는 뛰는 걸음으로 아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란이 남자에 대해 소개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어 팔을 감아 안고는 남자를 노려봤다.
이 아이하고 어떤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하면 가만 안 둬. 나랑 결혼 할 여자야. 오빠, 채석이는 조용히 해! 누가 너더러 말하랬어? 친구든 뭐든 어떤 놈도 너에게 손대는 거 허락 안 해! 네가 판 함정이야. 은 아란 넌 내 스스로 장난감이 되어주겠다고 했어. 그러니 날 원망할 생 각 마. 넌 내 거야. 이제부터는 권 제후의 아내이며 여자라고. 알아들어? 난폭한 입맞춤이 아란의 입술을 찾아왔다.
전번에 빌라에서 느꼈던 다정함과 배려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문득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수경을 생각하면 그랬다.
사랑하는 사이 는 아니었다지만 언제고 질리면 떠날 시한부의 상대였다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면 소유욕 때문일까.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순결한 여인을 연모(戀慕)하는 마음일까. 아직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이브의 열매에 손을 대려는 경쟁자를 물리치려는 치졸한 이기심일까. 그 어느 것이 이유이든 좋았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수경을 보냈으니 남은 건 빼앗기면 안 된다.
오빠. 핸들을 돌리는 거친 움직임을 보며 아란이 물었다.
아까 왜 그렇게 화났어요? 진짜 채석이 때문에 그래요? 그 녀석 이름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아. 화난 이유를 알아야 풀어줄 거 아니에요. 신호대기에 들어간 틈을 타 제후는 아란을 쳐다봤다.
내 맘에 들어 뭐하게? 네? 우리 계약 조건에 하나를 추가하자는 거야. 잘 들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좋고 친구를 사 귀는 것도 좋지만 누구하고도 연애는 금지야. 그런 걸 싫어? 아니요.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오빠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 말대로 할 게요. 대원 그룹 계열사의 호텔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란의 부모님을 모시고 양가 상견례를 하 는 동안 내내 그의 눈치를 살피는 아란을 보며 제후는 열 번도 넘게 학교에서의 행동에 후회를 했다.
편안한 청바지와 티셔츠 대신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어른들의 무관심에 묻힌 아란은 무척이 나 위태하게 느껴졌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는 새엄마와 눈길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누가 건들면 큰 눈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품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무지 무신경하게 그녀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괜찮아? 결국 혼자 떨어져 바람을 쐬러 나온 아란을 따라 나온 제후였다.
인기척에 흠칫, 숨을 멈췄 던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사람이 제후라는 걸 알고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 언제 들어도 다소곳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오빠는 왜 나왔어요? 네가 오랫동안 안 보이길래 찾으러 나왔지. 명색 부모라는 사람들은 몰랐어도 처음 아란이 머리가 아프다며 홀을 빠져나갈 때부터 보고 있었던 제후였다.
나 걱정 돼서요? 뭐, 그렇게 생각해서 기분이 나아진다면 네 마음대로 해. 제후는 아란의 물음에 쑥스러움을 느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정말 부부가 되긴 하나 봐요. 동문서답이었다.
응? 사랑이 없는 결혼도 가능하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럼 정말 재수가 없었겠군. 사랑하지도 않는데 가뜩이나 신랑이라고 걸린 놈이 권 제후 라서 말야. 난 오빠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러니 오빠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요. 사람들이 권 제후에 갖는 편견으로 우리 결혼 시작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냥 내 눈에 비친 오빠 모습을 믿고 싶어 요. 퍽듣기 좋은 말인데.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군. 남한테 칭찬을 받을 때도 있고. 파르르 떠는 아란의 어깨에 제후는 재킷을 벗어 걸쳐주었다.
아란아.경계심이 사라진 말투였다.
나 오늘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졌다.
그래서 너한 테 성질 부렸어. 미미안해요.아란의 얼굴에 실망한 듯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오빠 저 때문에 수경 언니랑 헤어진 거에요? 그런 거에요? 그리고 뒤이은 당혹감. 아란이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자 제후가 아란의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여다 대며 물었 다.
너 수경이 알아? 그러니까오빠 여자친구라서 알았어요. 오빤 우리 과에서 유명한 사람이고좋아하는 애 들도 많고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아란의 얼굴이 빨개진다.
제후가 짓궂게 캐물었다.
애들이 날 좋아한다고? 나 같은 망나니를? 그야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입술을 오물오물 오므려 붙이는 모양새가 참 고왔다.
내가 나쁜 놈이라서 착한 아이에게 눈 이 가는 걸까? 이 아이는 내가 나쁜 남자라서 그냥 끌려오는 걸까? 그럼 너도 나 좋아해? 갑자기 튀어 나온 말이었다.
눈에 띠게 동그래지는 아란의 눈을 보며 이번엔 제후가 당황했 다.
미친 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아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애들이 나 좋아한다기에 너도 혹시나 아란이 여기 있었니? 단아한 여자의 음성이 제후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문득 창백해지는 아란의 낯을 본 제후 가 고개를 돌렸다.
스무 살의 딸을 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젊은 새 어머니 나현이었다.
회장님 내외분이랑 얘기를 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사람들이 보이질 않지 뭐야. 제후군이 같이 있었다니 안심이지만 앞으로는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아라. 아란인, 제가 데리고 나왔는데요. 단 둘이 있고 싶어서요. 아란이 나현을 보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으면서 제후가 말했다.
생각지 못한 반격을 받은 그 녀의 얼굴이 일순 파래졌다가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머, 그래요? 제후군, 우리 아란이 만난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언제 그렇게 정이 들었을까. 내 생각에는 둘이 천생연분이 아닐까 싶어.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그렇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다정해보이시거든요. 고마워요. 그이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분명한 조소를 흘리며 나현이 돌아서 들어갔다.
밤공기가 차니 너무 오래 있지는 말라는 당 부와 함께. 괜찮아? 한숨을 쉬며 제후는 아란을 돌아봤다.
눈물, 사슴처럼 맑고 투명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난 저 여자 싫어요. 그리고 엄마 돌아가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저 여잘 데려온 아빠 도 왜 이 아이는 나를 붙잡을 말들만 하는 걸까. 그러나 제후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아란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넓은 가슴과 찬 공기로부터 그녀를 감싸줄 두 팔을 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어깨가 천천히 젖어왔다.
스무 살의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재벌끼리의 정략결혼이라는 특종을 잡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도 신부 대기실에서 식이 올려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란의 모습에 넋을 잃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과 긴장으로 상기된 볼, 잔잔히 내리 깔은 긴 속눈썹과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 뜨릴 듯 젖어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붉고 도톰한 입술, 하나로 올려 우아하게 드러난 목선과 탐스러운 사과 같은 가슴. 한없이 가냘퍼서 남자들의 보호의식을 자극하는 여성스러움. 국내 최고 디자이너의 손길에서 탄생한 하얀 웨딩드레스는 돌아가신 친어머니로부터 물려받 은 아란의 미모를 한층 빛나게 해주었다.
숨 죽여 감탄할 아름다움이, 필히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장미꽃다발을 바치며 사랑 을 맹세하고픈 사랑스러움이 그녀에게서 풍겨 나왔다.
식장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고 있던 제후는 부모님을 대신한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머 지를 부탁하고는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남들 눈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신랑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에 제후는 조소가 나왔다.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고작 일주일이 지난 후의 결혼식이었다.
돈만 있으면 무엇도 부릴 수 있다고 하더니 언제들 저렇게 연락을 받고 왔는지 넓은 홀을 꽉 채운 하객들과 풍성한 피로연 음식들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가장 믿기지 않는 건 검은 색 턱시도를 입고 아란에게로 가고 있는 제후 자신이었다.
제후는 노크 없이 신부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처럼 어린 친구들에게 둘러 싸여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란이 남자의 구둣발 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오빠. 같은 과 선배이며 이제는 친구의 남편이 된 남자를 쳐다보던 아이들이 제후에게 목례를 건 네고 자리를 피해 나가주었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기를 기다렸다가 제후는 아란에게 다가갔다.
좋아 보인다.
잠은 잘 잤어? 제후의 심장이 반가움으로 두근, 뛰었다.
그럭저럭요. 이 밤이 지나면 새 엄마 얼굴을 다시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 해서요. 그랬어? 푹신하고 두터운 천이 깔린 의자에 아란과 나란히 앉은 제후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살며시 걷어 올리고 입술에 키스했다.
한 입 베어 먹고 싶은 딸기향이 났다.
다른 건 몰라도 아란의 입술만큼은 그냥 보 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따가 실수하지 말고 잘 하자, 우리. 네. 전 오빠만 있으면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요. 아란이 웃었다.
이 날 정오에 시작한 예식은 피로연을 포함해 한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웨딩 카에 몸을 싣고 신접살림을 날 빌라로 향하는 동안, 아란은 제후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아가씨가 피곤하셨나 봐요, 도련님. 핸들을 잡은 박 기사는 대원 그룹의 모체인 (주)대원 전자가 세워질 때부터 수십 년을 권 회장의 출 퇴근을 맡아 온 사람이었다.
아무나 곁에 두지 않는 권 회장에게 신뢰 받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의 손을 빌려주신 걸 보면 할아버지가 이 결혼에 대해 얼마나 기대를 하고 계시는 지 제후도 알 수 있었다.
내 친구 놈들이 웬만큼 짓궂어야 말이지. 아저씨도 보셨죠? 우리 아란이한테 하는 거. 우리 아란이. 그 말에 박기사가 사람 좋고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춘다.
아란 아가씨가 도련님 마음에 단단히 드셨나 봐요? 귀엽잖아요, 애기 같고. 제후는 이마에서부터 헝클어진 아란의 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잠결에 응응거리던 아 란이 제후에게 안겨오며 팔을 뻗었고 제후는 잠시 박 기사의 눈치를 보다 그녀를 안아주었다.
저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도련님. 부부간에 내외해서 쓰나요. 나이 지긋한 박 기사가 백미러에 비치는 다정스런 광경에 다시금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래지 않아 빌라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도 잠에서 깨지 않은 아란을 업고 올라간 제후를 대신해 박 기사가 몇 안 되는 짐을 들어다 주었다.
종종 뵙겠습니다.
잘 사세요, 제후 도련님. 수고하셨어요, 아저씨. 기척이 사라지자 현관의 센서등도 자동으로 꺼졌다.
일차로 아란을 침대에 눕혀놓고 제후는 온종일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차분히 상황정리를 해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둘만의 생활이 시작됐다.
여자라기보다는 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녀, 은 아 란과 함께. 효도를 한답시고 할아버지 말씀을 따르긴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제후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는 거지. 제후는 깊은 잠에 든 아란의 몸을 감상하며 훑어보 았다.
은 아란(阿蘭). 이 결혼은 어디를 보나 나에게 유익인 계약이었어. 내가 원하면 무상으로 즐길 수 있는 여 자의 몸과 독립의 자유가 대가로 주어졌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해. 날 이 곳까지 오게 만들었고 널 지켜줘야 할 이유는. 제후는 아란의 몸을 반듯하게 돌려 눕히고는 스커트 속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을 벗겨냈다.
불편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 때 하다만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제후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한 꺼풀씩 아란의 몸에서 옷이 사라졌다.
그녀의 블라우스와 플레어스커트 위로 제후가 입고 있던 실크 셔츠와 정장 바지가 그 위로 겹쳐서 떨어졌다.
일어나. 제후는 아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 이대로 잠이 들면 어떻게 해? 오빠? 눈을 뜬 아란이 서늘해진 자신의 몸을 보며 놀라더니 시트를 끌어당겨 가리려고 했다.
제후 가 재빨리 아란의 손에서 시트를 빼앗아 저만큼 내던지고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오늘 우리의 첫날밤이야. 나더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밤을 새라는 거야? 제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란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피로연에서 제후의 친구들이 건넨 폭탄주를 마시고 난 때처럼. 그게 아니라 난 왜, 싫어? 그 땐 좋아했잖아. 저저기 씻고 나오면 안 돼요? 그 다음에 하면 싫은데. 난 지금도 널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귀여웠다.
제후는 씨익 웃으며 일어나려는 아란의 어깨를 눌렀다.
도무지 아란에게는 다른 여자들에게 한 것처럼 냉정할 수가 없다.
마치 어린 여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말투가 누그러든다.
겁먹지 마. 제후는 아란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야 처음이니까 아프겠지만 적어도 하고 나서 안 할 걸 그랬다는 말은 안 나오게 할 거 니까. 아란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제후는 마주 미소지어주면서 그녀를 감추고 있던 마지막 옷 들을 끌어내렸다.
처음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버린 남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가의 손자, 입맛대로 여자를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에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안하무인의 성격과 행동들. 그래도 아란은 제후를 사랑했다.
먼 바라봄만으로도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버렸다.
제후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래서 어른들의 사업상 합의에 불과한 제후와의 결혼에 일언반구의 반론도 없이 동의했다.
형식뿐인 결혼에 허울 좋은 아내였지만 제후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아란은 그것으로 바랄 것이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제후가 자신을 돌아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략결혼으로 맺 어진데다 성숙한 여자의 아름다움은 찾을 수 없는 평범한‘여자아이’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면. 아란은 고민하다 계약이란 말을 꺼냈다.
무엇이든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고. 대신 에 다만 나를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사랑까지는 힘들겠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나를 안아주겠다고. 난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늘 먼 곳에서 바라만 보던 사람을 내 곁에서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큼 난 오빠 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거짓말 때문에 오늘부터 심장이 감수해야할 아픔은 전보다 더 크고 견디기 힘든 것이 됐지 만 눈을 뜨면 곁에 있는 그 사람을 보며 상처도 잊을 거라고 아란은 생각했다.
마음으로 원하는 사람. 그리고 내 몸 만을 원하는 사람. 마침내 제후와 하나가 되는 순간.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불기둥을 느끼며 아란 은 까마득히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희망을 가져보았다.
언젠가는 이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작은 기대를 아란아. 그만의 쾌락에 몰두해 있던 제후가 격렬한 몸짓을 멈추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아 란의 눈가에 흩어지는 눈물을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달래주었다.
많이 아프니?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군 거야? 아니. 아니에요. 근데 왜 울어. 나 미안하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 오빠 사랑해요. 지금 이 시간이 믿기지 않도록 고마워서 그러는 거에요. 정말 괜찮아요. 처음 겪는 일이라 겁이 많이 났었나 봐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에요. 아란은 눈을 감아 눈물을 떨구면서 두 팔로 제후의 목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천천히 사랑하 는 남자의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에게 안긴 지금을 기억하고 싶었다.
아란은 계속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제후의 숱 많은 머 리칼을 헤집으며 넓은 등을 쓰다듬었다.
이대로도 좋아요. 나를 바라보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어도 좋아요. 왜냐하면 내가 그 만큼 더 오빠를 사랑하면 되니까요. 슬프지만 지금 나 행복하니까요. 어린 애랑 사니까 좋냐? 결혼하고 제후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었다.
요새 스무 살이면 어린애 아냐, 임마. 본인은 가만있는데 친구 두 놈이 남의 아내를 놓고 말을 나눈다.
그런가? 내가 아는 여자애 하나가 제후네 와이프랑 동갑인데, 남자경험이 백은 넘는다더 라. 열다섯 때부터 익힌 테크닉이 장난이 아니라지, 아마. 히죽,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말꼬리를 늘인 서훈이 제후를 쳐다본다.
제후는 표정 변화 없이 담배만 입에 문다.
남의 부부사, 뭐 그리 캐려 들어? 니 놈이 그건 알아 뭐하게? 혹시 욕구불만은 아닌가 해서. 경영학과 은 아란 유명했잖아. 순결반지 끼고 다니는 걸 로. 서훈의 말처럼 아란은 일명 http://iot.notkor.com 족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사람들의 추어올림에 넘어가 방 탕한 놀음에 빠지기 쉬운 외모를 가진 그녀였지만 남자들의 숱한 추근거림 한 번 허락한 적 없는 여자였다.
심지어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킨다는 맹세의 표시로 반지까지 끼고 다녀, 학교에선 시대의 희귀종으로 통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런 여자 데리고 살 재미가 나냔 말이지. 너 혹시 욕구불만으로 시달리는 건 아닌가 해 서. 야, 처녀도 처음에만 좋지 나중에는 재미없다.
여자란 모름지기 침대에서의 테크닉이 좋아야 야, 권 제후 너 어디 가? 말을 듣다 말고 일어서는 제후를 따라 서훈이 고개를 비틀어 올린다.
제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친구들을 돌아봤다.
니들이랑 같이 놀다간 내 수준까지 고공하락 할 것 같아서 간다.
수준 낮은 놈들끼리 잘 들 놀아라. 사선으로 매는 가방의 위치를 바로잡더니 제후는 두 손을 몸에 달라붙는 질감의 바지 주머 니에 찔러 넣고선 휘적휘적 사라져버렸다.
다리가 길어 움직이는 것도 빨랐다.
야, 권 제후! 냅 둬. 저 놈 걷는 거 보면 모르겠냐? 민준이 서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모름지기 신혼에 남자 걸음이 똑바르면, 파트너랑 문제가 있다는 거야. 나라면 일주일은 침대에서 안 내려온다.
귀 뒤 켠으로 친구 놈 둘이 장단 맞춰서 떠드는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흐드러진 벚꽃길을 걸어가는 제후의 얼굴에는 이른 나이에 유부남이 된 억울함도 욕구불만으로 인한 찡그림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새끼들. 그렇게 궁금하면 지들도 결혼해 보라지. 제후는 피식, 입가를 올렸다.
그야 완벽하게 만족시킨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침대에서의 아란은 뜨겁고 싱그러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라서 흡수가 빨랐다.
제후가 가르치는 대로 곧잘 따라와 주었다.
먼저 원하는 쪽은 언제나 제후였고 아란이 안아달라고 조르는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남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엄두도 못 냈을 뿐더러 남자의 벗은 상체만 봐도 양 볼에 배시시 붉은 물이 드는 여자였다.
마음에 안 드는 여자를 가리켜서 남자들은 귀엽다고 하지만 아란은 정말 귀여웠다.
아침에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무방비 상태로 바라볼 때, 등 뒤로 다가와 가만히 그의 허리를 감싸며 등에 머리를 기댈 때그 가 식 없는 수줍음에 제후는 어느새 마음을 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사실 제후는 아란과 사는 게 불편할 줄 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본가에서 지낼 때도 특 별한 용무가 없으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남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만큼,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아마도 그녀에게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1학년이라 수업이 많지 않아 제후보다 늘 일찍 집에 돌아오는 아란의 신발이 현관에서 보이 지 않으면 제후는 서운한 기분부터 들었다.
오빠. 미진과 승원이라고 했던가. 강의를 듣고 나오던 아란이 제후를 보더니 단짝 친구 둘에게 먼 저 간다는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늘 오빠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늦게 돌아온다면서요. 취소했어. 제후는 그를 향해 목례를 하는 미진과 승원에게 고개를 까딱해주고는 아란의 손을 잡았다.
작고 가느다랗다.
왜요? 너랑 같이 놀려고.제후는 되묻는 아란의 깜찍한 입술에 입술을 쪽 맞추며 말했다.
손잡 고 거리도 걷고 쇼핑도 하고 배고프면 저녁도 먹으러 가고 술도 마시고. 둘이서만요? 아란이 망설였다.
어차피 계약 커플에 불과한데 내가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건가? 그런 생 각이 들자 제후는 기분이 상하려고 했다.
싫어? 아뇨, 좋아요. 정말루요.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싫으면 관두고. 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벤치에 길게 팔을 뻗치고 앉았다.
아란이 죄 지은 사람처럼 겁에 질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서서 물었다.
화화났어요?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화 풀 거에요? 몰라. 제후는 코웃음을 치곤 시선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착한 아내라도 되어 보겠다는 걸까? 왜 그녀는 내 앞에서 자기 의지는 없는 사람처럼 내 비위를 맞추려 하는 걸까? 행여 계약이 깨져서 자신을 버리는 일이 생길까봐? 단지 그것이 두려워서? 오 제후야. 아란이 입을 열었을 때 그녀보다 행동이 빠른 여자의 목소리가 잘라버렸다.
아란과 제후, 두 사람 모두 그게 누구의 목소린지 알고 있었다.
아, 미안. 내가 방해한 거였어?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 더할 나위 없이 섹시한 외모의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 우리 가끔 봤지? 수경은 아란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란이 불안함으로 덜컥 덜컥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지만 예의상 고개를 까딱해서 인사를 받았다.
웬일이야? 제후가 일어나서 수경과 눈을 맞췄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제후의 얼굴이 아니 라 등을 보고 있는 아란에게는 그녀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웬일은. 그냥 지나가다 너 있는 거 보고 온 거지. 할 말 있으면 다른 데 가서 하자. 왜, 부인이 들어선 안 될 말 할까봐 걱정 돼서? 걱정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거지. 유감스럽게도 저 애하고 나, 그런 감상이나 주고받을 정도로 복잡한 관계는 아니거든. 제후가 아란을 힐긋 쳐다보더니 수경의 손목을 잡고 가버린다.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낯으 로 수경도 아란을 뒤돌아보고 그에게 이끌려간다.
알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오빠 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다 안다구요. 그래 도 화부터 낼 필요 없었잖아요. 조금만 기다렸다가 내 얘기 들어줄 수 있었잖아요. 단 둘이 시간을 보내자는 오빠 말에 머뭇거린 건 싫어서가 아니라 당황해서 그랬어요. 오빠 와 내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오래전부터 바라던 내 작은 소원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으 니까요. 그래요. 내가 만든 거짓말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하겠죠. 오빠를 원망하지 않을 게요. 다만 오늘처럼 날 너무 슬프게는 하지 마요.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고 자신조차 속여 버린 나지만 가능하다면 그 벌은 오빠가 없는 곳에서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 벌을 주는 사람도 오빠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화내는 오빠 얼굴 보면 무조건 미안하고 슬퍼지니까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은 아란이었다.
너 대체 뭐하자는 거야? 아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와서 제후는 수경의 손목을 뿌리쳤다.
권 제후, 억지부리지마. 내가 여기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했어? 수경은 손목을 주무르며 흥흥, 콧소리를 냈다.
난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던 거였다고. 근데 네가 끌고 온 거지. 아니, 솔직히 말해 도망 온 거지. 행여나 옛 여자와 있었던 추잡스런 과거가 밝혀질까 봐. 정곡을 찔린 제후는 입을 다물었다.
벌써부터 눈치 볼 만큼 아내한테 빠진 거야? 말했잖아. 그 애하고 나 감상이나 주고받을 복잡한 관계는 아니라고. 변명이지? 정 수경! 너 자꾸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나 귀찮게 굴래? 너 지금 찔러보는 말마다 반응한다는 거 알아? 수경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깊이 빨아들였다가 하얀 연기를 내뿜기를 수차례 기다림과 의문에 지친 제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수경이 꼬리를 이었다.
또 있어. 처음에 나한테 그 애 얘기 꺼내면서 헤어지자고 했을 때랑은 눈빛이 달라. 그 땐 동정과 약간의 호감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진지해. 진지하다고? 인간 대 인간으로 관심이 있다는 거야. 권 제후 넌 여자들의 몸과 심리를 읽는 데는 선수 지만 정작 네 것을 돌아보는 것엔 서툴러. 그래서 그 날 내가 널 붙잡지 않은 거야.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날 변화시켰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 제후는 수경의 얘기가 얼마만큼이나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해봤다.
은 아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보호의식 때문이다.
아란이 결혼 계 약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 새 어머니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그리고 또 다른 조건. 결혼 생활 중에 어떤 여자를 만나도 좋지만 마지막은 자신으로 해달라던 부탁. 하지만 이상 하게도 공식적으로 바람피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는 제후였다.
의식만 하지 못했을뿐 아란과 같이 있을 때에도, 그녀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아란의 생각만 하는 제후였다.
내 말이 맞는 거지? 수경이 재차 물었다.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일일이 내 마음 캐려고 들지 마. 앞으론 만나도 아는 척 하지 말고. 한참을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던 제후였지만 늘 그렇듯 표정을 감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다른 화제로, 수경과의 대화를 맺고는 왔던 곳을 되돌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바보 제후의 뒷모습이 멀어지도록 쳐다보고 있던 수경은 혼자 남겨진 호숫가 벤치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바보야, 이미 네 머릿속에 계약 같은 건 없어. 왔어요? 오늘도 저 말이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똑같은 말과 표정으로 현관에서 아란은 제후를 맞 았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지만 일체의 다른 말은 없었다.
먼저 밥그릇을 비워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고 나와 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설거지를 하고 드라마를 보려고 TV를 켠다.
아란아. 왜요? 자신을 닮아버린 무표정함에 신경 쓰였다.
아니, 간혹 슬픈 떨림이 멀리 떨어진 그녀의 어깨 에서 느껴지지만 제후는 차마 그 이유가 뭔지 묻지 않는다.
뭐 시킬 거 있어요? 다만 그 날 이후 확연히 달라진 행동에서 아란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새삼 깨달을 따름이었다.
그런 건 아닌데너 안 잘 거야? 벌써 11시잖아. 아란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리모콘을 손에 쥐었다.
오빠 피곤하면 들어가요. 난 이거, 마저 보고 잘게요.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 요. 마지못해 대꾸를 해 준 아란의 눈동자는 드라마 속에 묻혀 버린다.
웃고는 있는데 인형 같다.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살아서 숨을 쉬어서도 안 되는 인형을 바 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먼저 침대에 누운 제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본인이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데리고 사라져버린 일에 관해 아란은 이렇다 할 말은 안 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제후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꺼림칙 했다.
걱정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거지. 유감스럽게도 저 애하고 나, 그런 감상이나 주고받을 정도로 복잡한 관계는 아니거든. 그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동자도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누구를 위해 그런 말을 하며 뭘 확인하고 싶었냐는 듯 한없는 절 망과 아픔이 눈물로 고여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가 하나님 맙소사! 설마 저 아이가 나를? 제후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느긋하게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 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계약이라는 말을 먼저 입에 올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아이였잖아. 벽을 만들고 경계를 했던 건 권 제후가 아니라 은 아란이었다고. 제후는 복잡한 머리를 감은 눈 속에서 견디다 못해 손을 집어넣고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무 래도 숙면을 취하기는 그른 것 같다.
결국 방에 들어간 지 20분 만에 제후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우유나 데워 마실까 냉장고로 걸음을 옮기다가 시선을 돌려보니 TV가 봐주는 사람 없이 저 혼자 떠들고 있었다.
아란은 잠이 들어있었다.
추웠는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뜨릴 자세 로 리모콘을 손에 쥔 채 말이다.
요 근래 그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괘씸했지만 보살핌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려 붙인 그녀에게선 안쓰러움마저 느껴졌다.
자세도 영 불편해 보였다.
난방도 안 되는 거실에서 저러고 자다가 행여 감기라도 걸리는 게 아닌가 제후는 걱정이 됐다.
이럴 거면 드라마 본다는 얘기는 뭐하러 한 거야? 제후는 아란의 손에서 리모콘을 빼내어 전원을 끄고, 그녀의 등과 무릎 밑으로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애기처럼 삐지기나 하고 말야. 평소에 눈 뜨고 있을 때는 절대 하지 않는, 절대 권 제후답지 않은 말투와 표정으로 화를 내면서 제후는 어린 아내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눕혔다.
은 아란. 넌 꼭 말로 해야만 아냐? 그거 알아? 넌 안 그러게 생겨가지고 사람 마음을 참 혼란스럽게 만들어. 여전히 탐스러운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제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아란 의 몸을 안고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새벽에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며칠 꾸깃꾸깃 했던 하늘이 맑아지면서 모처럼 해가 나왔다.
놀기에도, 시험을 치르기에도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야~죽순이! 개방형 도서관에서 용케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고 있던 아란이 미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두리번거렸다.
야야, 은 죽순! 나 여기 있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미진이 아란의 등을 찰싹 때리며 옆에 앉는다.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입는 옷도 하는 짓도 사내 아이 같은 친구였다.
자꾸 죽순, 죽순 그럴래? 사람 낯 뜨겁게. 친구 별명도 맘대로 못 부르냐. 왜, 빠순이로 불러줄까? 그 잘나빠진 서방님 들으실까봐 걱정돼? 알아봤자 달라질 것도 없어. 아란이 풀 죽은 표정이 되더니 여태 까맣게 연습장을 채워가고 있던 볼펜을 놓고 한숨을 쉰 다.
미진은 단짝 트리오 승원과 더불어, 아란의 제후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는 나머지 하나의 친구였다.
‘죽순이’도 아란 이 죽고 못 사는 사람이 권 제후라고 해서 미진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너 니 서방님이란 무슨 문제 있냐? . 쯧쯧쯧. 뭐 표정 보아하니 안 물어봐도 알겠다만 그렇다고 이렇게 쭈그러져 있으면 어떡 해? 일어나라, 이 언니가 커피 한 잔 쏠게. 미진이 혀를 차더니 아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란은 굳이 거절하지 않고 친구의 뒤를 따라 나와 자판기가 있는 곳까지 왔다.
침대에서 널 거부하던? 다짜고짜 묻는 미진 때문에 아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냐. 그럼 테크닉 부족하다고 어디 가서 더 배워오라던? 아니지, 유부녀가 딴 놈한테 가서 배 워오면 불륜이 되는 건가? 야, 도대체 뭐가 문젠데? 아란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을 꺼냈다.
그게 있지, 오빠가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여자가 있다고? 그럼 그렇지! 권 제후 그 바람둥이 자식 너랑 결혼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 봤어. 아내는 아내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데리고 즐기겠다, 이거 아냐? 미미진아, 소리 좀당황한 아란이 입술에 손을 갖다댄다.
야, 이런 건 세상에 까발려서 망신을 당하게 해줘야 되는 거야.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그 만이지 어디 옛날 여자친구랑 바람을 피워, 바람을? 그래서 어떡할 건데? 어떡하긴! 니 눈앞에 데리고 와서 두 년 놈들을 그냥 요절을 갑자기 싸하게 가라앉는 친구의 표정에 미진이 입을 다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걸 두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아하하, 선배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한 말은 말해봐. 요절 낸 다음에는 어떡할 건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얼버무리는 미진에게, 제후는 담배연기를 멋들어지게 내뿜으 며 걸어왔다.
왜 말을 안 해? 설마 뒤에서 듣고 있을 줄 누가 알았나. 미진은 방정맞은 입을 원망하며 속으로 열두 번도 더 후회를 했다.
이래서 남의 연애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니까. 죄송합니다, 그게요 아란아, 내일 보자! 나도 시험공부 하러 가야지. 슬슬 제후의 눈치를 보던 미진은 뒷걸음질을 치다 후다닥 튀어 달아났다.
미진 의리 없는 친구는 관두고 은 아란, 나하고 얘기 좀 하자. 미진을 따라가려는 아란을 가로막으며 제후는 팔을 내밀었다.
더 이상의 회피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따라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오빠, 나요 따라오라고 했다.
기절시켜서 안고 가기 전에 내 말 들어. 협박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은 눈빛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잠시 제후와 시선을 섞은 아란은 그를 따라 사람이 없는 비상구로 나갔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내가 뭘꺄아앗!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후는 아란의 팔을 붙잡아 벽에 밀어다 붙이고는 반동으로 튀어 나오 려는 그녀의 몸을 그의 몸으로 가로막듯 눌렀다.
왜왜 이래요? 할딱이는 숨소리가 제후의 입술까지 와서 닿았다.
아란의 치켜 뜬 눈동자에 반항의 빛이 떠 오르는 것을 보고 며칠째 그녀를 안지 못해 주려 있던 수컷의 충동이 고개를 쳐들려고 했다.
집에서의 얘기는 집에서 끝내란 말야. 밖까지 끌고나오지 말고. 난 얘기한 적 없어요. 미진이가 멋대로 짐작하고 얘기한 거지. 눌려서 꼼짝도 않는 몸을 빼내려고 아란은 이리저리 비틀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반항을 하 는 그녀에게 제후는 새삼 호기심이 생겼다.
궁금하지? 제후가 말을 내던졌다.
그 날 수경이하고 사라져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집에 늦게 들어왔는지.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내 심장을 찢어놓는 걸로는 부족해서?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란은 목이 메는 걸 참고 간신히 대답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시간을 보냈는데 아무 관심도 없단 말야? 이런 말을 하면 아란이 상처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후의 예상대로 아란의 눈동자는 서 서히 붉은 빛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계약내용을 잊고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한 사람은 오빠잖아요. 은 아란. 제후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네 말이 맞아. 그리고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그게 뭔데요? 아란은 그 다음에 나올 말이 두려웠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나에게 넌 욕구 배출을 위한 도구라는 사실 말이야. 사랑 없는 섹스의 상대이며 길들여야 할 어린 애에 불과하다는. 심장에 꽂혀 있던 비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우르르 피가 몰려나왔다.
아란은 후들대는 무 릎에 억지로 힘을 주어 버텼다.
침착해, 아란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놀래. 나는 이 사람에게 아무 의미도 될 수 없다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알고 시작한 일이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저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어느 순간 기대에 부푼 가슴을 잔인하게 눌러 터트리는 이 남자의 눈 을 마주할 자신이 내게는 없어. 아란은 주먹을 쥐고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말했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도 되죠? 아란은 몸을 옆으로 비껴 비상구를 나갔다.
한 점 흔들림도, 매어 달림도 없는 시시한 반응 이었다.
낮은 굽의 구두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다가 급한 달음질 소리로 바뀌었다.
그녀가 멀어진다.
쿡쿡나 지금 대체 뭐하는 거야. 벽에 기대고 섰던 제후는 시니컬한 웃음소리를 내며 주저앉듯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울고 있을 아란의 모습이 현실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권 제후 너 나중에 배우하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따 놓은 당상이겠다, 그렇지? 넌 겁쟁이야. 중간고사가 끝나고 내주 수요일에 있는 MT에 관한 공고가 붙었다.
대략, 취업 준비로 바쁜 4학년들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모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너 갈 거냐? 귀찮게 뭐하러. 돈 내버리고 몸 버리고. 아란이가 간다면 갈 거지? 제후는 걸음을 멈추고 민준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민준이 슬밋, 웃었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되냐? 말뿐인 결혼이고 서로 자유롭다며. 그러니 아란이가 누구를 만나 도 너하고는 상관없는 거잖아. 민준이 담배를 끼고 있는 제후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허전한 네 번째 손가락에 민준의 눈길이 멈췄다.
이게 그 증거야. 권 제후가 은 아란에게 관심이 없다는 증거. 내가 관심이 없다고 다른 놈이 넘봐도 된다는 뜻은 아냐.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지만 민준을 쳐다보는 제후의 눈에는 분명한 적의가 드러나 있었다.
권 제후 넌 너 할 짓 다 하고 다니잖아. 과 여자애들이랑 밥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런데 왜 아란이는 안 돼? 걔 이제 스무 살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훨씬 자유롭게 살았을. 결혼은 그 쪽에서 먼저 원했어. 매달린 사람도 그 아이였고. 어른들 성화에 마지못해 박자 맞춰 준 거다?민준이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 권 제후! 넌 이미 그 애한테 휘둘리고 있어. 제후가 눈썹을 꿈틀, 올렸다.
휘둘려? 신경 쓰이잖아. 만약 다른 놈이 사정 알고 아란이한테 프로포즈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 고 있잖아. 민준이 손가락으로 제후의 가슴을 쿡 찔렀다.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내버려두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도 싫고 관 심을 가지는 것도 싫어. 그걸 가리켜서 보통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질투. 됐어, 그만해라. 지금 얘긴 못들은 걸로 할 테니까 다시 입 밖에 내지마. 피하지 말고 들어.민준은 돌아서는 제후의 등에 대고 말했다.
이번 MT, 가는 게 좋을 거야. 나 그 아이한테 고백할 지도 모르거든. 고백? 허튼 소리 하는 거 아니니까 명심해. 아란이가 싫다고 하면 마음을 접겠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그 땐 적극적으로 덤빌 테니까. 한 민준 너 진심이야. 나, 아란이를 좋아해.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생각되는 말을 들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일 친한 친구가 그냥 여자친구도 아닌 아내를 좋아한다는 것은 제후에게 충격적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그 땐 적극적으로 덤빌 테니까 설거지를 하는 아란의 뒷모습에 친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허튼 농담으로 남을 잘 웃겨도 진지할 때는 더 없이 진지한 놈이 민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제후였다.
뭐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였는데 이번만큼은 제후도 민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 다.
정말로 아란을 좋아해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얼음왕자의 가면을 깨뜨 리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인지를. 커피 마실래요? 너 거기 좀 앉아 봐. 제후는 아란의 손을 잡아 앉혔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내 친구가 내 앞에서 널 좋아한다고 했다.
너한테 고 백한다고.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오빠? 아란이 냉전 중인 것도 잊고 덩달아 심각해진다.
제후의 이런 불안한 표정은 처음 본다.
무 작정 붙잡아 앉히더니, 손을 붙잡고 쳐다보고만 있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너하고 사는 게 계약 때문이 아니라면 넌 뭐라고 할래? 혹시 네가 그만두자 고 말할까봐 겁이 난다면 나더러 겁쟁이라고 할래? 오빠 MT때문에 그래요? 난 안 간다고 했는데. 제후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아란이 지레짐작해 말을 꺼낸다.
어 왜? 몰랐어요? 그 날 할아버지 생신이잖아요. 친척들이랑 모두 모일 텐데 오빠하고 저도 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갈 마음은 있었는데 생신 챙기느라 못 간다 이거야? 가야지. 난 또 네가 잊고 있나 해서 물어본 거야. 퉁명스레 대답을 하고 일어나는 제후의 입에선 한숨이 나왔다.
아란이 민준의 고백을 들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럭저럭 마음이 편했다.
제후는 침실로 들어가다 말고 말을 덧붙였다.
정 가고 싶으면 가든지. 친구들이랑 어울릴 시간까지 빼앗을 자격 나한테 없으니까. 과 대표한테 얘기했어요. 이해하더라구요. MT가면 남자애들이랑 한 방에서 자고 술도 마 시고 그럴 텐데 나 그런 거 싫어요. 그래서 안 간다고 했어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네 마음대로 하지.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우린 부부잖아요. 지킬 건 지켜야 하니까 그녀와의 관계는 여전히 그가 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심한 말을 들었는데도 예의 운운 차리는 걸 보면. 그 때 제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우리, 여행 갈까? 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후가 재차 물었다.
싫어? 할아버지 생신은 어쩌고요? 아침에 일찍 본가 다녀와서 오후에 시간 맞추면 되지. 어차피 MT 있어서 학교도 쉬니까 한 2박 3일 예정해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둘이서요? 제후는 첫 번째 데이트에서 거절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끼워 넣고 싶은 사람이라 도 있어?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의외라서 그래요. 의외라니? 오빤 혼자 있는 걸 좋아하잖아요.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할 줄 몰랐어요. 지킬 걸 지키는 거지. 부부니까. 제후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결혼한 사람이 아내 떼어 놓고 혼자 여행 간다고 해봐. 단박에 우리 부부 무슨 문제 있어 저런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걸. 그러니까 오빠 혼자 여행을 가고 싶은데 이상한 소문나는 게 두려워서 나더러 같이 가 자고 하는 거에요? 구색 맞추려고? 그럴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말도 안 했어. 그냥 혼자 훌쩍 떠나서 나 어디 있다고, 전화 한 통으로 끝내버렸겠지. 어떻게 할 거야? 이번은 믿어도 되요? 마음 놓고 오빠한테 의지해도 되요? 아란은 망설였다.
함께 가자. 서로를 더 많이 아는 계기도 되고 좋을 거야. 알았어요, 준비할게요. 불안함에 흔들리는 까만 눈망울. 제후는 그의 제안을 그녀가 못미더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 았다.
아직도 그 말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아란아.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제후는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난 좀 즉흥적인 데가 있어. 감정에 치우치면 가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 곁에 두어도 그립고 보고 싶던 그녀의 향기가 체온에 섞여 코끝을 아찔하게 했다.
그 날 내가 했던 말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해서. 어느 것도 내 진심은 아니었으니까. 미안 하다.
나, 용서해 줄 수 있지? 그럼요.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미워하고 또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처음부터 내게 주어진 건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는데 힘들어도 기다려야 한다는 운 명뿐이었는데. 그래요, 알았어요. 제후는 오랜만에 아란의 웃음을 보았다.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 만졌다.
반듯한 이마와 눈꺼풀과 균형을 잡은 콧날을 따라 제후의 입술이 내려왔다.
화해의 순간에 머뭇거리는 제후의 입술에 아란의 입술이 용기를 내어 닿았다가 떨어졌다.
제후를 올려다보는 아란의 눈에 맑은 물기가 고여 떨어졌다.
약속 꼭 지키는 거야. 제후의 마음속에 아란의 눈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제후는 아란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입맞춤을 했다.
그것은 이내 굶주림을 대변하듯 거친 키스로 바뀌었지만 그의 가슴 속으로 그녀의 간절한 사랑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란아, 밖에서 누가 너 찾아. 경영통계학 2교시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커피를 마시러 나갔던 승원이 찾아온 사 람이 있다며 나가보라고 했다.
누군데? 낸들 아니. 근데 굉장히 잘 생긴 남자야. 찡긋, 윙크를 보내고 승원이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남자라니, 누굴까 제후 오빠면 승 원이가 말을 했을 텐데. 아란은 책을 덮고 나갔다.
강의실 복도를 낀 창가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등을 보고 서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 우리 구면이지? 결혼식 때 보았던 제후의 친구였다.
그리고 현재 2학년의 과대표이자 임원을 맡고 있는 사 람이었다.
한 민준 선배죠? 손바람을 일으켜 담배연기를 몰아내며 아란이 콜록거리자, 민준이 담뱃불을 껐다.
맞아. 너 담배 싫어하지? 미안하다.
기침을 멈춘 아란이 민준을 쳐다봤다.
유유상종,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더니 외모에서 풍기 는 인상이 제후와 많이 닮았다.
오빠가 뭐 부탁했어요? 아니,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너 만나러 온 거야. 시간 돼? 민준의 눈이 아란의 왼손 약지에 살핀다.
백금 링 가운데 다이아몬드가 박힌 결혼반지가 손 가락을 둘러싸고 있었다.
통계학 강의가 한 시간 더 남았어요. 그보다 왜 저랑 만나야 하는 건데요? 제후에 관한 거야. 그 녀석 입으로는 절대 말 안 할 비밀. 비밀이면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죠. 본인 직접 듣거나 몰랐으면 몰랐지, 도둑고양이처럼 주 워듣고 싶은 생각 없어요.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왠지 불쾌했다.
돌아서는 아란의 뒤에 대고 민준이 말했다.
그 녀석 반지 안 끼고 다니는 거 알아? 그래서요? 아란은 문간에 걸쳤던 발의 방향을 바꿨다.
좀 미안한 소리이긴 한데 나 너희들에 대해 알고 있어. 이 결혼, 어른들의 필요로 묶여졌 고 본인들 사이엔 아무런 애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말야.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러 온 건 가요? 제법인데 은 아란. 제후 얘기라면 무조건 따라올 줄 알았더니 이거 보통 내기가 아니잖 아? 아까의 배려를 잊은 듯 민준이 담배를 다시 꺼냈다.
떠도는 소문이라도 근거는 있기 마련이지.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사는 거 힘들 지 않아? 심리학을 전공하기라도 했는지 민준이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란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건 선배가 참견할 일이 아니에요. 오빠하고 내가 알아서 할 문제죠. 좋아하지? 뭐라구요? 잡아 뗄 생각 하지 마. 일부러 계약이란 말을 꺼내서 그 녀석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끌려고 한 것도 다 알고 있으니까. 뭘아란은 반박을 하려다 단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가 뭘 원하고 왔는지는 몰라 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에요. 안녕히 가세요. 때마침 복도를 걸어오는 교수님의 모습을 핑계 삼아 아란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서 두르거나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민준은 혼자 웃음을 지었다.
좋아.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번엔 다시 제후 녀석을 찔러 보러 가야지. 임마, 어디 갔다 오냐? 전공 수업까지 빼먹고. 점심시간이라 북적대는 학생 식당. 강의 시작 5분 전 대출(代出)을 부탁받았던 서훈이 민준 을 보고는 볼멘소리를 했다.
알았어, 새꺄.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밥 한 끼 사는 걸로 끝날 생각 마. 어림도 없어. 대출 한 번 해 준 것 갖고 재기는아아, 알았어! 2차까지 책임지면 되잖아. 서훈의 넉살과 주먹을 받아준 민준은, 제후가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이 놈은 어디 갔냐? 누구, 제후? 아까 강의 끝나자마자 발이 안 보이게 뛰어나가더라. 만날 사람 있나보지. 아란이? 꼭 부부라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 학교에서도 자주 어울려 다니더라고. 그리고 넌 아 무리 같은 과 후배라고 해도 그렇지 친구 부인 이름을 막 부르냐. 아란이가 뭐야, 아란이가? 서훈이 핀잔을 주자 민준이 속을 감추면서 웃었다.
부르라고 지은 이름이야. 제후 그 놈만 아니었으면 내 여자가 내 여자가 됐을 사람이라고?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민준의 말을 잘랐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제후가 서서 친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 봐, 그래? 그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눈과 눈이 싸우고 있었다.

민준이 의자를 빼고 일어나 제후에게 걸어갔다.
어쩌다 재수가 없어 네 놈 품에 들어간 거지, 원래 아란이는 내 여자가 될 운명이었어. 정 확히 말해 빼앗긴 거지. 그것도 하필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권 제후한테. 야야, 너희들 왜 그래?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서훈이 밥 먹던 걸 팽개치고 따 라 일어났다.
여차하면 싸움이 벌어질 것처럼 보이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조 서훈 너 못 들었어? 한 민준, 이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내 말이 어때서?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 게 잘못이냐? 얼음 왕자 권 제후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퍽! 제후의 주먹이 민준의 얼굴로 날아갔고 민준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터진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민준이 비웃는 시선으로 친구를 올려다봤다.
꼴에 남자라고 맷집도 있었네. 다시 봤어, 권 제후. 죽기 싫으면 그 입 닥쳐, 한 민준. 살기였다.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제후의 주먹은 금방이라도 민준의 턱을 날려버릴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럴 수 없다면 어떡할래? 민준이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가 아란일 차지하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면? 친구 관계도 끊어버리고 너와 기꺼이 싸울 준비도 되어 있다면 어떡할래? 절친했던 친구가 싸움을 걸고 있다.
부인하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민준의 모습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제후는 가슴이 막막해지면 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란이, 좋아하는 사람 있다.
민준이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당연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제후의 입에선 반대의 반응이 나왔다.
돼먹지 않은 거짓말로 자극할 생각이면 관 둬. 아까 만나고 왔다.
돼먹지 않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야. 누굴 만났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제후였다.
대학 근처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서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아란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길이 엇갈렸다.
그녀의 친구인 승원은 통계학 강의가 끝나자마자 몸이 아파 오후에 있는 강의는 듣지 못할 것 같다면서 아란이 집에 갔다고 했다.
또 어떤 남자가 아란을 찾아왔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대 화를 마치고 들어온 아란이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는 얘기까지도. 그런데 뭐가 진실이라는 거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신경 쓰는 거지? 한 민준. 일식(日蝕) 후의 하늘처럼 심장을 가렸던 시커먼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알 것 같았다.
아란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민준의 얘기 에 왜 이처럼 동요하고 있는지. 제후는 핏속을 떠돌아다니던 얼음조각들이 하나 둘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널 인정한다.
하지만 아란이는 너와 나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 가질 전리품이 아니야. 그래서? 너에게 아란이가 물러날 수 없는 진심의 대상이라고 해도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 앨 너한테 보내는 일은 없을 거다.
은 아란은 이미 내 아내고 그러니 누구한테도 보내지 않아. 설사 나랑 사는 게 그 앨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도 제후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고백일 수도 있는 제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학 생들의 웅성거림이 따라왔지만 모른 척 했다.
한 민준, 왜 그랬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리에 앉아 식어버린 오므라이스를 먹고 있는 민준을 보며 서 훈이 물었다.
너 친구 여자나 건드리고 그럴 놈 아니잖아. 앉아. 앉아서 남은 밥이나 먹어. 서훈은 대답을 해주기 전까지는 밥도 내팽개쳐 둘 것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선, 부지런히 숟 가락을 움직이는 민준을 쳐다봤다.
알고 싶냐? 내가 왜 사람 많은 데서 미친 짓 했는지? 그거야 뻔하잖아. 제후랑 아란이랑 잘 되게 해주려고 연극한 거 아냐. 미련 둔탱이 손자 놈 좀 어떻게 해달라고 제후네 할아버지가 돈 주면서 시켰지? 민준이 고개를 끄덕끄덕 웃었다.
http://awin.accs.kr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공범 노릇하느라 애썼다.
이 일, 제후한테는 끝까지 입 닫아라. 할아버지의 예순 다섯 번째 생신 당일(當日), 제후는 아침 일찍 아란을 데리고 청담동 본가 를 찾았다.
어렵기만 한 시할아버지에게 인사드리기 무섭게 손님들이 몰아 닥쳤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아란은 시할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 옆에서 음식을 나르고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 하나 더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일도 많은데. 옆에 둘 틈이 없는 아란을 보며 제후가 불평을 했다.
도무지 허리 펼 틈이 없잖아요. 예뻐하고 옆에다 두기만 하셔도 모자랄 판에 어린 애 불 러서 일이나 시키고 이게 뭐예요? 투덜투덜, 손자는 말이 늘었다.
생전 제 일 말고는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 챙길 줄도 모르는 놈이었는데 짝을 지워주고 나서는 달라졌다.
권 회장은 새삼 손자를 일찍 결혼시킨 게 잘한 일이지 싶었다.
이틀 전 손주의 친구 놈한테 연락이 왔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염려 않으셔도 좋 다고. 좀 서툴러서 그렇지 서서히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고. 제후야. 권 회장은 틈만 나면 아내의 뒷모습만 눈으로 쫓아다니는 손자에게 개량한복의 주머니에서 비행기표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네가 부탁한 거다.
비행기는 김포에서 2시고 제주도에 도착하면 호텔에서 보낸 리무진이 마중 나올 게다.
번거롭다고 신혼여행도 안 갔던 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게야? 저희들 잘 사는 모습 보는 게 할아버지 소원이잖아요. 퉁명스런 대답에도 웃음이 나오는 권 회장이었다.
그거야 그렇지. 증손자 보고 싶지 않으세요? 사내구실을 하기에는 서울이 너무 뻑뻑하고 요란스럽더냐? 조용한 곳에 가면 일이 더 잘 풀리는 것도 사실이죠. 할머니. 제후는 어깨를 으쓱하고 할아버지가 건넨 비행기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할머니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지 않고 왜 나왔어. 노사모가 방금 부쳐낸 전을 접시에 담으며 돌아섰다.
제후는 친손녀처럼 할머니 옆에서 일손을 돕고 있는 아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실 어리 광 부리고 만든 거 집어먹기만 해도 귀여움을 받을 나이의 그녀였다.
아란이 좀 잠깐 빌려가려고요, 괜찮죠? 앞치마를 두르고 시할머니에게 해물전 부치는 걸 배우고 있던 아란은 느닷없이 손목을 낚아 채서 방으로 끌고 오는 제후 때문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나 할머니 도와드려야 되는데. 도우미 아줌마는 폼으로 부른 줄 알아? 앞치마 풀고 앉아봐. 제후는 행여 누가 들어올까 봐 문까지 걸어 잠근다.
음식 접시를 들고 오가느라 힘들었는지 주먹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아란이었다.
이거. 아란은 제후가 건네는 표를 받아들었다.
오늘 날짜의 비행기표였다.
제주도로 결정했어요? 어. 아란이 표를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제후도 아란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그녀의 말을 기다린 다.
잘 됐다.
나 제주도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진짜? 아란이 웃는 얼굴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론, 남들은 수학여행이다 신혼여행이다 숱하게 가는 제주도 구경 한 번 못 해본 사연이 궁금해진 제후는 다가가 아란의 어깨를 감싸고 나란히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진짜에요. 초등학교 수학여행 땐 경주로 갔고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 땐 못 갔어요. 아란은 이유를 묻는 제후의 시선에 웃는 듯 마는 듯 말을 덧붙였다.
새엄마가 사춘기 여자애는 먼 데 나가서 바람 쐬고 그러면 좋은 거 없다고 아빠한테 그랬 거든요. 나, 사실 대학도 간신히 온 거에요. 대학도 안 보내려고 하셨단 말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딸을 고등학교까지밖에 안 보 내? 재혼하고 나서 아빠는 새엄마하고 일밖에 몰라요. 내가 뭘 원하는지 내 꿈이 뭔지 관심도 없고 그냥 대학 졸업하면 시집보내는 게 나에 대한 아빠 계획의 전부였어요. 제후는 양가 상견례가 있던 날, 아란의 아버지와 새 어머니가 보였던 행동들을 떠올렸다.
스 무 살을 갓 넘긴 딸을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부모의 애틋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뿐인 딸의 행복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그저 이 결혼을 통해 들어올 회사의 유익과, 눈엣 가시 같은 전처의 딸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던 그들은 제후의 입장에서도 좋아질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란아. 나중에 다른 세상에 태어나면 그 때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요. 아란은 오빠도 포함해서요, 란 말은 하지 못했다.
사람 무안하게 톡톡 쏘긴 하지만 친오빠 같은 다정함으로 그녀를 지켜주는 사람 제후의 사랑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이렇게 의지할 가슴과 어깨가 있는 것으로 감사하자고 늘 심장을 달래는 그녀였다.
나를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들 곁에서요. 아란의 한숨을 제후는 키스로 막았다.
촉촉하고 아찔한 입술의 감촉을 겉에서만 느끼기가 아쉬워 그녀의 입 안으로 혀를 넣고는 뜨거운 향기를 나눠 삼켰다.
아란이 제후의 목에 팔을 걸며 몸을 붙였다.
그의 손에 길들여진 몸은 키스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며 떨고 있었다.
제후의 손이 아란의 등 뒤로 가 실크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가냘픈 허리를 따라 원피스 가 아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송두리째 흔들리는 이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제후도 옷을 벗어던졌다.
여행 얘기만 하고 내려갈 참이었는데 불이 붙자 멈출 수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아란은 순결한 나신으로 제후를 받아들였다.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거 친 움직임과 손길을 힘겨워하면서도 순종했다.
제후는 녹초가 되도록 아란을 안고 또 안았다.
미친 사람처럼 아란의 몸속에서 권 제후의 소유를 확인했다.
그는 어느 샌가 그녀가 아니면 쾌락을 느낄 수 없는 남자로 길들여져 있었다.
애 데리고 올라가서 뭘 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니? 손님들 오시는데 나와서 좀 맞지 않 고. 누르면 붉은 물이 떨어질 것 같은 아란의 뺨과 제후의 옷자락을 쥐며 등 뒤로 숨는 그녀의 행동이 위에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권 회장 내외는 짐짓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손님들이야 할아버지 만나러 왔지, 저 보러 왔어요? 사돈어른들이 오셨단다.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니? 제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새어머니와 대면해야한다는 말에 핏기가 가시는 아란의 안색 을 보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곳에서 싫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 계시는데요? 옷을 쥔 아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제후의 등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희미하게 떨 리는 작은 어깨가 안쓰러워서 제후는 견딜 수 없었다.
권 회장이 손가락으로 귀한 손님이 아니면 모시지 않는 방을 가리켰다.
다른 손님들과 따 로 모셨다.
매무새 가다듬고 들어가서 인사 여쭙고 나오거라. 제후도 피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평소에도 잘 지내냐는 전화 한 통 없는 부모 같지도 않 은 사람들과 아란을 대면시키는 이 상황을 그녀에게서 가려주고 싶었다.
아란아. 제후가 머뭇거리자 권 회장의 눈이 아란을 향했다.
어서 들어가서 인사 드리거라. 결혼하고 나선 처음인데 무척 보고 싶었을 것 아니냐. 제후는 사정도 모르고 아란을 몰아다 붙이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보는 눈, 듣는 귀 많은 이 자리에서 사실을 얘기할 수도, 경거망동을 저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나! 그 때 어디선가 남자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아란의 다리에 매달려 얼굴을 비비댔다.
아란이 몸을 굽히더니 웃으면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이제 다섯 살이나 됐을까 누가 보면 엄마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녀를 빼닮은 꼬마였다.
누구야? 내 동생 재영이요. 결혼식 때 안 봤었어요? 하지만 아란이 넌외동딸이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제후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 아 이는 새어머니에게서 난 의붓동생일 것이다.
누나 이 아저씨 누구야? 아저씨? 제후는 맹랑한 꼬마의 발언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란이 웃으며 동생의 말을 정정했다.
재영아, 아저씨가 아니라 매형이야. 누나랑 결혼한 사람. 누나 이 아저씨랑 결혼했어? 엄마랑 아빠처럼 같이 사는 거야? 아빠라기보다는 차라리 할아버지가 낫겠다.
제후는 획, 팔짱을 끼며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 다.
그럼 아기는 어디 있어? 결혼하면 엄마 아빠처럼 아기도 낳는 거잖아. 재영이 동생 어디 있어? 덕분에 아란의 긴장이 덜어지긴 했지만 누나를 차지하고 있는 어린 처남이 마음에 들지 않 는 제후였다.
제후가 아란의 목에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는 작은 팔을 풀려는 찰나, 손님 방 문이 열리더 니 그녀의 부모님이 나왔다.
아이를 어르고 있던 아란이 새어머니를 보고는 동생을 거실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한테 갈래, 재영아? 누나는 어디 가야 되거든. 웅웅, 싫어. 누나도 같이 집에 가. 응? 재영아, 이리 온. 저 낳아준 엄마가 부르는데도 재영은 누나에게만 매달려 징징거렸다.
제후가 발을 공중으로 동동대는 아이를 떼어다 엄마에게 안겨주었다.
고마워, 권 서방. 그리고 너도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새어머니의 마지못한 눈길이 아란에게 닿았다.
염려했던 거와 달리 아란은 떨지도 않고 말 을 받았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나야 늘 잘 있지. 이 사람이 잘 챙겨주니까. 아내의 어깨를 안으며 다정스레 대답하는 아란의 아버지를 보면서 제후는 역겨움마저 일었 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힘들게 재혼하셨는데 오죽 하시겠어요? 삐딱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란이 그러지 말라는 듯 제후의 팔을 잡았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을 뿐 더러 제후도 그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너무 사이가 좋아서 딸이 어떻게 사는지는 궁금하시지도 않나 봐요. 저희 결혼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전화 한 통도 안 하시고 말입니다.
저도 부러울 정도라니까요. 농담 속에 드러나는 가시. 은 사장 내외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흐려지는 것을 보며 권 회장 이 나섰다.
제후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할아버진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나 계세요, 소리가 이 사이에서 걸렸다가 목으로 넘어갔 다.
제후는 조롱기를 입가에 걸었다.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뭘 잘못했는지 전 모르겠 는데요. 제후야! 마침내 권 회장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왔지만 그렇다고 제후가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 려 건방진 눈동자 속에 두 사람을 가두어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들도 깨달아야 돼. 없는 사람 취급 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때늦은 사랑 놀음으로 무시당해 내쳐진 자식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당신들도 알아야 돼. 제후는 아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천천히 놀다 가세요. 저희는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거든요. 얼굴 풀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아란은 내내 불안한 얼굴이었다.
너도, 지금 내가 너무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죄송해서 그래요. 오빠도 괜히 저 때문에 은 아란.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던 제후가 무서운 얼굴로 아란을 돌아보았다.
말해두는 데 너하고는 상관없이 내가 한 말이야.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대하는 그 분들 태도에 내가 기분이 나빠서 한 마디 한 거라고. 알았어? 아란이 눈길을 돌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기분 잡치게 그런 얼굴도 하지 말고. 이래서야 둘이 여행 가는 기분도 안 나잖아. 미안해요. 안 그럴게요. 이러니 당하고만 살았지. 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 화를 가라앉혔다.
은 아란, 너 여기서 조금만 나빠지면 안 되겠냐? 까짓 망신 한 번 준 거 가지고 마음 쓰 지 마. 그 사람들이 그런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기나 할 거 같아? 사실은 아란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사실은 저도 속이 시원했어요. 오빠가 그 말 안 했으면 내가 했을지도 몰라요. 다만 오빠 가 할아버지 눈에 나는 건 아닐까, 사람들이 오빠 나쁘게 보면 어쩌나 그게 걱정됐어요. 제후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거기 온 손님 중에 나 그렇고 그런 놈인 거 모르는 사람 없 어. 그래도 나 때문에 오빠 나쁘게 보이는 거 싫어요. 정말로요. 네 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기지 않는데 왜 네 눈엔 내가 안 보이는 걸까. 제후는 속 이 쓰렸다.
그만해라. 빼도 박도 못할 말 가지고 가타부타 떠드는 거, 머리 아파. 제후는 몸을 의자에 묻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를 가만, 쳐다보는 아란의 시선과 이내 고개를 돌리는 나즈막한 한숨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했다.
기대하게 만들지 마. 네 착한 눈빛을 마주하는 게 얼마나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 알아? 사랑은 느낄수록 괴로웠다.
낯설고 힘들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 호텔에서 보낸 VIP 전용 리무진을 타고 호텔로 들어갔다.
우와~예쁘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의 객실에 짐을 풀자마자 아란은 곧장 발코니로 뛰어나갔다.
그러더니 인어공주가 되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난간을 손으로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여기 진짜 마음에 들어요.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감사하는 말씀 꼭 드려야겠어요. 할아버지의 생신을 위해 입었던 답답한 정장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제후는 대답했다.
그러던지. 직접 마중을 나온 지배인의 말에 따르면 신혼부부에게 인기가 높은 방이라고 했다.
이틀을 머무는 데 190만원이고 사흘에 260만원을 호가하는 고급형의 허니문 패키지용 객실이란다.
얼른 옷 갈아입어. 바다 보고 싶다며. 조금만 더 보구요. 제후가 니트 셔츠에 청바지로 갈아입을 동안까지 아란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후의 마 음속에 불쑥 짓궂은 장난기가 돌았다.
아쉬워하며 허리를 바로세우는 아란의 등에 제후의 가슴이 닿았다.
그만 보고 가자니까. 제후는 두 팔로 각각 아란의 어깨와 허리를 둘러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면,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그냥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까? 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싫다.
넌 내가 마법을 풀어줄 때만 살아 숨을 쉬는 인형이었으면 좋겠다.
그그치만 아까 집에서두 거긴 거기고 호텔에서 하는 건 처음이잖아. 제후는 아란의 목을 가리고 있던 긴 머리를 헤치면서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불그스 름한 입술자욱과 고른 치흔(齒痕)이 남았다.
게다가 우린 부부고어디에서도 거리낄 게 없어야 한다고. 아란의 귓불을 깨물며 제후가 물었다.
허리를 안았던 손이 내려가 스커트를 밀어올리고 매 끈한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자어떻게 할까? 밖으로 나가서 멍청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줄까, 아니면 이 곳에 서 갑자기 돌아선 아란이 제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입술을 맞댔다.
등 뒤로 파닥이며 스커트를 들추는 바람만큼이나 그녀의 행동은 대담했다.
아란이 입술을 떼었다.
원해요. 해요. 한 음절이 숨어 나왔지만 제후는 그 말이 허락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
요정들의 눈물처럼 수정이 되어 떨어질 듯 잔잔한 물기가 아란의 눈에 고인다.
아란아 그의 뺨을 쓸어내리는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제후가 말했다.
나 겁쟁이야. 나 너 데리고 도망 온 거야. 밑도 끝도 없이 퍼 올리는 말이었다.
어둠에 깊이를 감춘 우물에서 처음 두레박으로 퍼 올 린 맑은 물이었다.
사실은 내가 오빠. 제후의 팔 안에서 아란의 허리가 휘어지며 다가갔다.
코끝이 부딪치는 거리에서 아란은 제 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 말 꼭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면, 하고 나서 오빠 마음 상하게 할 말이라면 하지 마요. 사람들 떠나서 둘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아무 생각 하지 마요. 여행 왔으니까 좋은 기억만 만들어요. 아무도 끼워주지 말고 그냥 우리 생각만 하면서 지내요, 네? 그녀가 말하는‘우리’는 특별하게 들린다.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닌 우리. 그런데 그 우리 사이에 누가 끼어들면 어떻게 하지? 하나도 아닌 둘. 너를 좋아하는 사람,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널 영원히 차지할 수 있는 걸 막아버리 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너 좋아하 바로 그 때 제후의 핸드폰이 주인을 찾았다.
제후는 긴장이 푹 수그러드는 걸 느끼면서 아 란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고 거실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제후, 네 이 녀석! 할아버지셨다.
제후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됐죠?! 제후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예 핸드폰의 배터리를 뽑아 버렸다.
오빠아란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 돌아가면 틀림없이 배로 혼나겠지만 아무도 너한테 뭐라 안 할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랬어요. 오빠가 잘못한 건 내가 잘못한 거고 난, 오빠가 할아버지한테 혼 나는 거 싫어요. 그래? 제후는 웃는 듯 마는 듯 입가를 찡그렸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에 대해 ‘우리’를 강조하는 아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부르시면 저도 데리고 가요. 같이 혼나줄게요. 같이 혼나줘? 어감이 재미있었다.
마지못한 미소는 진심이 되고 말았다.
제후가 아란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하긴.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 예뻐하시니까 너 데리고 가면 야단은 덜 맞겠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닌 순수한 미소가 제후를 따라 아란의 얼굴에 고였다.
그저 바 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 웃고 있으면 온 세상이 빛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아냐? 그건 다 권 제후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 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먼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를 보고 승원과 미진이 했던 말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녹여보고자 웬만한 미모를 갖춘 여자들이 줄줄이 덤벼들었지만 마음을 얻고 떠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했다.
떠난 사람이 여자가 먼저든 권 제후가 먼저든 그가 미련을 갖고 찾는 경우도 없다 했다.
포기해. 저 선배 맘 좀 뺏어보겠다고 설치다가 바보 된 애들 하나둘인 줄 아냐? 친구들의 만류에도 변함없던 절실한 외바라기에 하늘도 감동하셨는지 인연이 맺어졌고 심지 어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게까지 되었다.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제후는 아란의 몸만은 좋아했다.
진짜 속을 내비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녀가 없으면 가끔 서운해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바라만 보고 말도 못 걸던 옛날에 비하면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을, 아란은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헤어지면? 나한테 싫증을 내고 계약을 끝내자고 말하면? 가슴에 싸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란은 작은 콧소리 섞인 한숨을 쉬며 제후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안겼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시원한 향수냄새와 체취를 숨 속으로 담아 넣었다.
언젠가 그가 떠날 때 언젠가 혼자 남겨질 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며 견딜 수 있도록. 제주도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다음부터 제후는 강의라든가 반드시 떨어져 있어야할 때를 빼 고는 아란을 옆에 붙이고 다녔다.
결혼을 빨리 해서 못해봤던 평범한 데이트도 했다.
강의가 비는 시간 틈틈이 전화를 하고 기다리고 만나고, 아란이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녔다.
같이 술 마실 시간도 없냐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도 권 제후, 사람 달라졌다고 신기한 눈으 로 쳐다보는 여자들의 시선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만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권 제후가 만든 시간 속에서 권 제후를 생각하는 것으 로 아란의 머릿속을 채워주고 싶었다.
오빠, 이거 봐요! 아란이 갑자기 제후의 팔을 잡으며 멈춰 섰다.
학교 앞 분식점에서 칼국수로 저녁을 먹고 소화 시킬 겸 아이쇼핑을 하다가 쇼윈도에 걸린 목걸이가 예쁘다고 들른 보석 전문점 안이었다.
크리스탈로 만든 거래요. 너무 예쁘죠? 아란이 가리킨 것은 손 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큐피드 상이었다.
앙증맞은 날개를 달고 하 트가 달린 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줄까?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 중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는 걸 보며 제후가 말했다.
정말요? 제후가 말했다.
안 될 게 뭐야. 너나 나나 어차피 돈만 남아도는 집 자식들이잖아. 내가 맘만 먹으면 이 보석가게 전부를 사다가 안겨줄 수도 있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제후의 말투에 아란이 웃는다.
소리 없는 웃음에 그녀의 양 볼에는 깜찍한 볼우물이 진다.
두 개였으면 좋겠는데 손때가 묻을까 조각상 아래 빌로드 천이 깔린 상자를 통째로 들고 있던 아란이 중얼거렸다.
응? 이거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요. 오빠하고 나하고 하나씩 나눠 갖게. 짝 있어요, 손님. 보여드릴까요? 옆에 있던 직원이 카운터로 따라 오란다.
마음만 먹으면 이 보석가게 전부를 사서 안겨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던 까닭에 그녀의 태도는 굉장히 친절했다.
여직원이 뭐라고 얘기를 하자 남자직원이 금고를 열더니 비슷한 크기의 상자를 꺼내고 뚜껑 을 연다.
하트에 화살이 꽂힌 모양의 조각이 누워 있었다.
예쁘다! 아란의 감탄사에 제후가 어깨를 으쓱, 했다.
직원들과 주인의 낯에 화색이 떠오르는 걸 보니 꽤 값이 나가는 모양이었다.
두 분 사귀는 사이세요? 귀족적인 고상함에 적당한 반항기가 돋보이는 근사한 외모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 였다.
여자의 예쁘다는 말 한 마디에 망설임 없이 지갑을 꺼내고 카드를 긁는, 성격 화끈한 남자 의 뒷모습을 보던 여직원 하나가 상자 두 개를 포장하며 말을 붙인다.
남자친구가 아가씨한테 푹 빠져 있는 것 같던데 그래요? 아란은 가게 밖에 나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제후를 창 너머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가능성은 없었지만 듣기는 좋았다.
이왕이면 커플링도 하지 그래요? 혼자 덜렁하니 우정 반지 같은 거 끼지 말고, 사귄지 오 래 된 사이면 웃고 있던 아란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즐거워서 까닥거리던 손가락의 움직임도 투명한 유리 위에서 멈추었다.
저희, 부분데요. 부부요? 그치만 남자 분은 반지를 끼고 있지 않던 손님의 달라진 표정을 보고 여직원은 입을 다물었지만 말은 뱉어진 다음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비참함이었지만 아란은 막 포장이 끝난 상자를 들고 훌쩍 밖으로 나와 버렸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계약에 묶인 부부라서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는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형식상의 관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는 약속. 아란아! 담배를 태우며 친구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던 제후는 그가 기다리는 것조차 잊은 듯 앞 을 지나쳐 황망히 걸음을 옮기는 아란을 보고 대충 통화를 마무리 하고 그녀에게 뛰어갔다.
어디 가. 오늘 할아버지 만나러 가기로 아란의 팔을 잡아 돌려세운 제후는 뜻밖에도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과 맞닥뜨린 순간 말 을 끝맺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원망, 분노 하여간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낼까요? 목이 메는 음성으로 아란은 제후를 쳐다봤다.
그냥 우리 여기서 끝낼까요? 뭐? 할아버지 앞에서 오빠가 사 준 선물이라고 좋아하며 자랑하는 아란의 얼굴을 볼 기대감으로 들떠 있던 제후의 낯이 구겨졌다.
해도 해도 안 될 사람들이라면 그냥 여기서 끝내자고요!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을 시간도 달래줄 틈도 없었다.
하얀 얼굴 가득 눈물을 터트린 아란 은 그대로 뒤돌아서 뛰어가 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아란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바닥 에 떨어진 상자를 주워 올리며 제후는 아득한 불안함으로 심장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죄죄송합니다, 손님. 아까의 여직원이 옆에 서 있었다.
제가 실수를 했어요. 두 분이 결혼하신 줄도 모르고 그만 커플링이나 하는 게 어떻겠냐 고 커플링? 제후는 무심결에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란과는 달리 어떤 구속도 허용치 않을 것처 럼,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텅 비어 있는 그의 손가락을. 직원이 알고 말했던 것도 아니고 제후의 고의도 아니었지만 비싼 선물을 덥석 안겨주고는 아란의 마음을 깔아뭉갠 꼴이 되고 말았다.
진작에 끼고 다녔어야 했는데 쑥스러움에 미뤄두었던 일이 치부를 드러내 그녀가 망신을 당 하게 만들었다.
뭐야?! 당신 눈에는 그 비싼 반지가 고작 우정 반지로 보였단 말야? 죄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보상을 해야 이 여자에겐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후는 화가 났다.
아니 그보다, 바람이 팽팽했던 풍선이 터져버린 것 같은 아란의 눈동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를 냈다는 건 그에게 기대하고 있던 것이 깨졌기 때문이라는 뜻인데 말이다.
나한테 기대를 해? 그 남자가 아닌 나한테? 본가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할아버지가 생신 때의 일에 대해 뭐라고 꾸중을 하셨는지 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제후는 집에 가면 아란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가만 고민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치를 보는 일이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라면 용기를 낼 수도 있는 제후였다.
불안하진 않았다.
어느 덧 심장을 내 준 사람이기에 그리고 문득 문득 기대를 갖게 만드는 아란의 행동에 대한 설레임이 가슴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상한 속을 달래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건 아닌가 했지만 옥외 주차장에서 떨리는 맘으로 올려다 본 그들의 보금자리에는 불이 커져 있었다.
저녁나절, 그렇게 아란과 헤어지고 내내 구겨져 있던 제후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펴졌다.
엘 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고작 3층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가쁜 호흡에 들먹이는 심장을 억누르며 벨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먼저 열렸다.
왔어요? 어응. 아까 그러고 간 게 미안해선지 아란은 어색한 음성으로 눈을 피한다.
그래도 죄책감이 드는 건 아란이 아니라 제후 쪽이었다.
집에는 언제 왔어? 온 지 한 시간쯤 됐어요.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아란의 어깨에서 바람이 인다.
그 모습을 보자 잠시나마 가졌던 제 후의 설레임은 구석으로 밀려난다.
아까 그 말 왜 한 거야? 내던지는 말이 퉁명스러웠다.
아란이 침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춘다.
말해두겠지만 우리 결혼 오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죠. 아란이 말을 가로채며 뒤돌아섰다.
내가 아쉬워서 매달린 결혼이니까 혼자였던 생활로 돌아간다고 해도 오빠는 별로 아쉬울 게 없다는 거죠?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 내 마음 같은 거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거죠? 내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받아들였는지 오빠한테는 아무 상관없는 거죠? 굵은 눈물방울이 아롱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후는 울컥하는 마음에 아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는 넌! 너만 아픈 게 아니란 말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두고 사는 나는 편한 줄 알아? 멀쩡한 줄 알아? 넌 뭘 그렇게 잘했는데? 날 다그칠 만큼 순결한 요조숙녀에 조강지처야? 겉으로는 나밖 에 모르는 여자처럼 하고 다녀도 막상 뒤로는 여우짓하고 다니는 지 어떻게 알아? 아니에요나 정말 사랑하는 사람 오빠밖에 없어요. 왜 몰라요 꼭 말로만 해야 되는 거에요? 마음으로 날 봐줄 수는 없는 거에요? 내 심장이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악에 받친 한 마디가 아란의 입을 뚫고 터져 나왔다.
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알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오늘오늘이 무슨 날이었는 지 오빠는 알기나 해요? 제후의 눈빛이 주춤했다.
아란이 제후의 손을 뿌리쳤다.
오늘 내 생일이었어요. 축하한다는 말 듣고 싶었어요. 엄마 돌아가신 이후로는 축하받은 기억도 없는 날이지만 그래도 오빠에게만은 단 한 사람 오빠에게만은 더 이상 비참해질래야 비참해질 수도 없었다.
손으로 가리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 큼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 걸 느끼며 아란이 뛰쳐나간다.
멍하니 서 있던 제후가 탕! 문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아란아! 제후는 신발도 신지 않고 따라 나갔지만 아란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황급한 심정 으로 그녀를 찾는 그의 귀에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악! 사람이 다쳤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 설마 하는 불안감에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 서 제후는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웃들을 헤치고 들어간 제후의 눈이 커졌다.
아란아! 계단 아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분명 아란이었다.
벗겨진 한 짝의 신 발이 계단 중간에 걸쳐져 있었다.
아란아, 제발! 넋 나간 표정으로 아란을 안아든 제후가 창백해진 그녀의 뺨을 두드리다 말고 웅성대며 모 여선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에요! 사람이 다쳤는데! 구급차, 누구 구급차 좀 불러줘요!! 가벼운 뇌진탕이라면서! 그거 말고는 다친 데도 없다면서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방안이 다 쩌렁쩌렁 울렸다.
의사 생활 25년에 이렇게 막 되먹고 시끄러운 보호자는 처음 보겠다고 생각하며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꺼냈다.
자자, 일단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래야 저도 무슨 말씀을 드리던지 할 것 아 닙니까? 뒤에 서 있던 권 회장이 제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노인의 자애로운 눈빛이 거친 감정에 휩 싸인 손자의 마음을 다독였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환자분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약간의 타박상과 골절상을 입 은 것 외에는 이봐, 의사 선생!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뭔가 새로운 걸 얘기해 보라고! 나는 왜 아란이 가 깨어나지 못하는지에 묻고 있잖아! 제후야! 할아버지의 엄한 목소리에 제후는 억지로 숨을 가라앉혔다.
의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환자분이 거부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의식중에 깨어나는 걸 거부하는 것 같습 니다.
뭔가 두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지금으로썬 무슨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확약도 드릴 수가 의사가 말끝을 줄였다.
제후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구급대에 실려 온지 벌써 사흘 밤낮을 넘겼는데 아란은 죽은 듯이 잠만 잘뿐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죽은 듯이. 내 심장이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알 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오늘오늘이 무슨 날이었는지 오빠는 알기나 해요? 오늘 내 생일이었어요. 엄마가 돌아가 신 이후로는 축하받은 기억도 없는 날이지만 그래도 오빠에게만은 단 한 사람 오빠에게만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무너졌다.
이대로 영원한 잠에 들어 깨어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다시는 아란의 맑은 웃음을 볼 수 없 는 건 아닌가 방정맞은 생각들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은 머릿속을 오가는 제후였다.
지친 발을 끌어 병실로 돌아왔다.
깊은 잠에 든 아란의 얼굴은 평온해보였지만 그와 함께 하는 일상이 두려워 일어나지 못한 다는 말에 제후의 가슴은 핏빛 멍울이 지고 몇 톤짜리 돌을 얹은 것 마냥 무거웠다.
다가가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대고 눈을 감았 다.
눈물 한 줄기가 제후의 뺨을 타고 흘렀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잖아. 나한테 실망하고 화나더라도 내가 철이 들 때까지 기다리고 참아주라. 부부란 원래 그런 거 잖아. 나란 놈한테 실망해서 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널 채웠다고 해도 이런 모습이 마지막이면 안 되는 거잖아. 아란아 내 목소리 들리면 좀 일어나봐. 내 마음 알기 전까지는 멀리 가지마. 나 놔두고 혼자 먼 데로 떠나지마. 다시 그녀 없는 시간이 흘렀다.
네 번의 낮과 밤이 일상을 만들며 지나갔다.
학교에는 가야 된다는 할아버지의 엄명에 따르 긴 했지만 제후는 아란의 간호를 맡은 사람이 할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안절부절 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끼니를 챙길 틈도 없 이 달려오곤 했다.
제 에미 애비가 죽은 후로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 없는 권 회장은 손 자며느리가 걱정되면서도 아란에게 몰두하는 제후의 모습을 다행스런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제후는 남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의 생일에 아란과 부모님과의 관계를 모르는 척 했던 것도 손자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아란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쉴 곳을 찾지 못해 헤매던 마음이 안식처를 찾았다는 걸 말이다.
이제 미움 받는 역할은 그만해도 될 것 같군. 그동안 수고했네. 어느 날 새벽인가 아란을 간호하다 곁에 엎드려 잠이 든 제후를 보며 권 회장은 병실을 나 와 밖에서 문병 차, 들렀던 공범에게 말했다.
그 녀석이 미처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좋아했을 걸요. 민준이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언제쯤 말해주는 게 좋을까요? 이번 일도 있고 두 사람 다, 슬슬 진실을 알 때도 된 것 같은데. 내버려 두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제 3자보다 서로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제일 행복할 테니까. 제후가 마음을 숨기는 바보짓만 하지 않는다면요. 그 때 낮은 굽의 샌들을 신고 복도를 뛰어오는 간호사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권 회장에게 다다르자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은 아란씨 보호자 되시죠? 빨리 병실에 좀 와주셔야겠어요. 우리 아이가 깨어났습니까? 그게 아니고 병실로 환자분의 아버지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 손자 분이 막 더 듣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하는 권 회장이었다.
제후가 아란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이상은 그랬다.
어둠에 묻힌 복도에서 http://webdaum.net 유일하게 불이 켜진 병실이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넓은 용적의 빛이 바닥을 비추고 거기선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가! 여기서 사라지라고! 당신이 무슨 아버지라고 딸이 다쳐서 입원해 있는데도 일주일 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당신이 무슨 아버지야! . 의사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잘못하면 평생 저러고 있을 수도 있대. 부모라는 사람들이 결 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넘긴 딸이 영원히 잠들어서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 그거 알기나 해? 깨어나면 두려 운 일이 기다리는 것처럼 깨어나는 걸 거부하고 있대. 이보게 권 서방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란의 아버지가 사위에게 낯을 보이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제후 가 말을 가로챘다.
당신과, 당신의 새 아내에게는 눈에 거슬리는 짐이었는지 몰라도 아란이 이제 나한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누구한테도 상처받지 못하게 내가 지킬 거고 아무도 이 아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 있으 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가. 여기서 사라지고 다시는 오지 마! 절규. 그리고 차마 말해주지 못한 사랑. 우리 누나 아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문틈으로 제후와 은 사장의 대화를 듣고 있던 권 회장과 민준의 귀에 아이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이제 못 일어나? 재영이었다.
엄마보다 배다른 누나를 더 따르던 그녀의 동생이었다.
아저씨 우리 누나 죽었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재영이 제후의 바지를 잡고 흔들었다.
재수 없는 소리 집어 쳐! 죽긴 누가 죽었다고 그래! 아이의, 아란을 빼닮은 눈동자에 다시금 죄책감이 스며들었다.
제후는 아이가 놀랄 수 있다 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금 아저씨가 그랬잖아. 아저씨가 그랬잖아. 끅끅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재영은 누나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부벼대는 눈이 붉었다.
제 후는 한숨을 쉬며 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
미안하다, 꼬마야. 아저씨가 잘못했어. 누나 안 죽어. 그냥 자고 있는 거잖아. 일어날 거야. 꼭 일어나서 널 안아줄 거야. 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영은 제후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아이들 특유의 달콤한 체취가 한가득 안겨왔다.
제후는 아란을 안듯이 아이를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달랬다.
아무 일 없을 거야정말로. 목이 메어왔다.
제후야. 민준이, 그리고 할아버지가 문간에 서 있었다.
본의 아니게 엿들은 꼴이 되어 버렸구나, 미안하다.
언제 오셨어요? 그리고 민준이 너는? 제후는 재영을 안은 채로 일어났다.
아란이 문병 왔다가 할아버지를 만나서 담배 한 대 태우고 들어오는 길이야. 괜찮아? 네 녀석 온 건 하나도 안 반가워. 민준이 피식 웃으며 사돈과 함께 나가는 권 회장을 쳐다봤다.
은 사장의 무거운 걸음새를 보아하니 긴 얘기가 될 것 같았다.
곧 반가워하게 될 걸. 너,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하자. 아란이 걱정되면 여기서 해도 좋 고. 옆 침대에 재영을 재워놓고 있을 때 캔 커피 두 개를 든 민준이 병실로 돌아왔다.
너 어제도 밤샜다면서 몸은 괜찮은 거냐? 중간 중간 자니까 견딜 만 해. 달고 시원한 냉커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잠이 깨는 듯 했다.
아란이 좋아하지? 캔을 들어올리던 제후의 손이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내 말이 맞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가 제후의 입가를 맴돌았다.
민준이 말을 이었다.
뭐 너 하는 짓 봐선 묻지 않아도 당연한 얘기다만 그냥 확인해 본 거다.
그 때 내가 아 란이 좋아한다고 했던 거 기억 나냐?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냐? !! 경악의 표정이 제후의 얼굴에 떠올랐다.
민준이 바닥에 깔린 커피를 마시기 위해 캔을 살살 흔들었다.
그래, 맞아. 나 너한테 거짓말 했다.
난 너 만큼이나 예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친 구의 여자를 노릴 정도로 비열한 놈은 아니야. 그런데 왜 나한테 부탁한 사람이 있었어. 네가 행복해지기를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이. 할아버지가? 민준은 제후의 생각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어땠을 거 같냐? 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서투르잖아. 할아버 지는 진실을 깨닫도록 너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거야. 지기 싫어하는 네 성격에 누가 네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가만히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고 싫어도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까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신 거지. 결 국 할아버지의 판단은 옳았고 지금 넌 여기 이 자리에 있잖아. 아란이도 이 사실 알아? 몰라. 아마 내가 자기한테 접근한 게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걸. 그 녀석, 너도 알겠 지만 사람을 너무 잘 믿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분도 안 하고 덥석 믿어버려. 제후는 허무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 동안의 고민이 다 쓸데없는 거였다니. 말이나 들어보자. 너 아란이 찾아가서 뭐라고 했냐? 어느 덧 경계심을 풀은 눈동자였다.
민준이 싱긋 웃었다.
궁금하냐? 그걸 말이라고 해? 할아버지랑 짜고 나 속인 건 괘씸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용서해준 다.
음처음엔 반지 얘기 하면서 속을 찔러봤고 두 번째는 너희들이 계약 결혼 한 거 알고 있다고 했고, 세 번째는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고 했지. 그랬더니 뭐래? 선배가 뭘 원하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을 거에요, 그러더라. 아마도 내가 자기한테 구애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나봐. 순진한 녀석. 진심하고 장난도 구분 못하는 바보. 가까이 있으면서도 참 어려운 사랑을 하는 커플이었다.
자식이, 그러는 저는 바보짓 안 한 줄 아나. 민준은 아직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생 각하는 어리석은 친구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도 속아 넘어갔으면서 뭘 그래. 나한테 주먹질까지 하고. 한 민준 연기력이 좋았던 거지. 정작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지만 제후는 입을 다물었다.
비단 아란의 입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에서라도 그녀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도 멀쩡할 자신이 없었다.
민준아. 왜. 나 힘들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데 그 아이가 원하면 보내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놔 줄 수가 없어. 욕심 부리면 정말 아란이가 달아날지 모르는데 원래 사람 좋아하는 건 다 그런 거야. 민준은 제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너처럼 지극정성인 남자 놔두고 어딜 가겠냐? 도망가더라도 일주일 동안 잠 못 자 고 밥 못 먹어가며 고생한 네 은공은 갚고 가라고 그래. 민준아.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친구를 부르는 한숨이 깊었다.
그런 만큼 그의 사랑도 깊었다.
아란이 쓰러졌던 날, 나한테 처음 화를 내더라. 내 심장이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지 알기 나 하냐고, 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막 울어 버리더라.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아무 에게도 축하받은 적 없다던 생일날에 날 만나고 처음으로 맞는 생일날에 단 한 사람 오빠한테만은 축하받고 싶었다고 그러더 라. . 사랑이 없어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난 항상 그 앨 다치게만 만들더라. 나중에 보니 까 내가 그 앨 내쫓아버렸더라. 제후야 아, 맞다.
해도 해도 안 될 사람들이면 늦기 전에 끝내자고 아란이가 그러더라. 한 민준, 너 어떻게 생각해? 나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걸리는 게 많군. 민준은 한 조각 희망도 남지 않은 얼굴로 넋두리를 하는 친구가 가여웠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사랑을 모른 채 마음을 가두고 잠이 들어있는 아란에게 화가 나려고 했다.
아란이 보내고 너 혼자 살 자신 있어? 자신이야 있지. 미쳐버릴 자신. 죽어도 돌아볼 사람 없으니 원혼이 되어 세상을 떠돌 자 신. 그럼 보내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다 꼭 붙들어 두고 살아. 내가 너 사랑하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곁에만 있어달라고 졸라. 은 아란은 착하니까 소원을 들어줄 거야. 억지 부려서 더 정 떨어진다고 하면? 이런 겁쟁이! 권 제후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그럴 일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해. 민준은 제후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웃어주었다.
제후를 향한 아란의 마음을 알기에 자신 있었다.
그의 친구는 확실히 달라졌다.
조각 같은 외모와 냉담한 분위기로 여자들을 녹이던 권 제후 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사랑을 처음 하는 사람처럼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겁을 내고 두려워하고, 고 민을 했다.
만약 아란이 끼고 다니던 순결반지의 주인공이 바로 자기라는 걸 알게 되면 제후가 뭐라고 그럴까 문득 궁금해지는 민준이었다.
제후야. 병원 로비. 그를 배웅하러 나온 친구에게 민준은 마지막 충고를 했다.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아란이네 아버지한테 심하게 굴지 마라. 판단은 네가 아니라 아란 이의 몫으로 남겨둬야지. 아무리 그래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분 아니냐. 알았어. 아란이 일어나면 그동안 장난쳐서 미안했다고 대신 사과도 건네주고. 알았다니까. 택시를 부른 민준이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든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제후는 병실로 돌아왔다.
아직도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아란을 보았지만 이제는 기다림마저 달가웠다.
제후는 아란이 의식을 잃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잠이 들어 있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보며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키스를 하면 일어나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마저 들었다.
입술이 닿았다.
깨어 있을 때처럼 여전히 보드랍고 향기가 난다.
!! 세 번째 키스를 하고 제후가 얼굴을 들려했을 때 목에 둘려지는 것이 있었다.
가늘고 미약 한 움직임이 동시에 느껴졌다.
설마, 설마!! 가슴 가득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제후는 감았던 눈을 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아란의 눈 동자가 무려 8일 만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너너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한없이 기쁜 순간에 너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응, 나 일어났어요. 나 진짜 많이 잤죠? 젠장!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왈칵, 목이 메어 오고 있었다.
아란은 제후의 몸을 가만히 밀면서 일어났다.
제후가 얼른 아란의 어깨를 잡아 부축해주었다.
그래, 이 잠꾸러기야. 무슨 잠을 8일씩이나 자냐?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겨주다가 제후는 부서질 것 같은 아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며 칠 사이 수척해진 몸에, 줄무늬 환자복 속으로 느껴지는 헐거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해요. 빨리 일어나려고 했는데 누가 발을 잡고 안 나줬어요. 눈을 뜨고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반겨줄 사람 아무도 없다고 그냥 여기서 살라고 그랬어요. 까만 옷에 얼굴도 없는 무서운 사람이 자꾸 날 붙잡았어요. 무서웠어? 아란은 대답을 하지 않고 손깍지를 끼어 제후의 등을 안았다.

그의 어깨 언저리가 천천히 젖어왔다.
그녀의 몸이 흐느낌으로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입술을 깨물었다.
가까스로 참아내는 그녀의 눈물은 고통이 되어 제후의 심장으로 배겨왔다.
다시는 너 혼자 무서운 꿈에 남겨두지 않을 거야. . 우린 항상 같이 있을 거야. 언제든 널 지켜줄 거야.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그리고 나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아란의 감은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제후는 말했다.
창 밖으로 먼동이 트고 있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 날과 하늘을 두고 제후는 그렇게 가 슴을 저리며 찾아온 첫사랑을 고백했다.
아빠가 새엄마랑 헤어지기로 했대요. 은 사장의 전화를 받고 나갔던 아란이 저녁때를 훌쩍 넘겨 들어와 하는 말이었다.
아빠 없는 동안에 나한테 함부로 한 거 전주댁 아줌마한테 들었나 봐요. 그동안 아빠 노 릇 제대로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전주댁 아줌마는 아란이 여섯 살 때부터 은 사장네 살림을 봐줬던 사람이었다.
엄마가 돌아 가시고 나서 유일하게 정을 붙인 사람이라고, 새 엄마가 들어와 알게 모르게 구박을 받으면서는 더욱 의지를 했던 사람이라 고 아란은 얘기하곤 했었다.
재영이는? 엄마가 데려가서 키운다고 하셨는데 확실한 건 모르겠어요. 원래 재영이가 새 엄마보단 나하고 아빠를 잘 따랐거든요. 제후는 알 만 하다는 듯 말했다.
치장하고 가꾸느라 아이 돌 볼 틈도 없었나보지. 아마도요. 아란의 얼굴에서 긍정의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새 엄마가 계서서 아빠가 행복하다면 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왠지 아빠가 이혼 을 결정하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죄송스러워요. 난 아무래도 좋다는 사고방식은 버려. 남을 위해서 희생할 생각만 하지 말고 좀 이기적으 로 굴어봐. 아란이 넌 행복할 자격 충분히 있어. 제후는 마주 앉았던 소파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 그리고 나 커피 마실 건데 생각 있으면 같이 마시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구수한 커피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면서 주방으 로 들어가는 제후를 보며 아란은 혼자 웃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제후는 줄곧 다정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처음엔 보상 심리 때문인 가 의심도 해보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의 다정함은 변함이 없었고 스스럼없는 장난기와 짓궂은 행동은 그들이 보통의 신혼부부 처럼 살고 있다고 아란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계약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해서 만난 사람들처럼 말이다.
알았지? 끝내자는 말 절대로 하지 마. 이제 겨우 두 달 좀 넘게 살아보고 맞는다느니 안 맞는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자. 퇴원 기념으로 찾은 레스토랑에서 제후는 그런 말을 했다.
손을 끌어다 잡으며 조심스레 말 을 내는 그의 눈을 보면서 아란은, 제후와의 관계에 좋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고 머잖아 그의 마음이 진 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제후를 믿게 되었다.
요즘만 같으면 세상에 무엇도 바랄 것 없는 사람처럼 아란은 행복했다.
거기에 욕심 부려 한 가지 소원을 빈다면 그도 그녀를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녀 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었다.
커피 향 좋지? 좋아요.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아란이 한모금의 향을 들이마셨다.
정말이지 저 웃는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까봐 애태웠던 걸 생각하면 그녀가 얄밉기까지 한 제후였다.
잔잔히 부딪치는 시선에 아란이 뺨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근데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예뻐서. 제후는 턱을 괴고 키득 웃었다.
장난치지 마요. 장난 아닌데. 진짜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 거야. 한층 노골적인 시선에 부끄러움이 또르르 몰렸다.
아란은 잔을 손으로 감싸고 살그머니 제 후의 눈을 피한다.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왜 모르고 살았을까. 너처럼 귀엽고 착한 아이 옆에다 두고도 왜 모르고 지냈을까. 커피를 다 마신 아란이 잔을 씻어 물기가 빠지도록 받침대에 얹고는 허둥지둥 주방을 나간 다.
뒷모습을 쫓던 제후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따랐다.
그리고 아란의 팔을 잡아 침실로 들어간 다음 문을 잠갔다.
아란아. 보상 받고 싶다.
너 없이 혼자 보냈던 것만큼 우리의 시간을 행복한 기억으로 채우고 싶다.
오늘 너 안아도 돼? 그그치만 거절해도 소용없어. 보름동안 참아줬으니까 오늘은 내 맘대로 할 거야. 물러서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제후는 아란의 몸을 침대에 밀치듯 쓰러트렸다.
성 급한 손길을 따라 드러나는 여자의 몸에 호흡이 가빠왔다.
건강이 나빠졌다고 며칠 햇빛 구경을 안 시킨 탓인지 피부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이 아 름다운 몸을 옷으로 가리면 오히려 죄가 될 것처럼 보였다.
내일 토요일이지? . 그럼 우리 밤새도록 여기서 놀자. 전화와도 받지 말고 누가 벨 눌러도 열어주지 말고 내 일 아침까지 놀다가 자자. 몰라요. 싫어요가 아니라 몰라요다.
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몸을 열어주는 것처럼 아란은 수줍음을 많이 탄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도 잘 하면서 그에게만 그런다.
그런 아란의 행동이 제후에게는 <당신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 졌다.
그리고 매번 처녀를 방문하는 것 같은 짜릿함을 선사했다.
싫으면 지금 말하던가. 아란이 시트를 끌어올려 가슴을 가리면서 말했다.
싫어도 오빠 맘대로 한다면서요. 후후, 이제 보니 삐지기도 하잖아? 제후는 아란의 화내는 모습이 신기했다.
언제나 그 앞에선 쥐 죽은 듯 꼬리를 내리고 하라 는 대로 따라주던 그녀가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걸 했다.
은 아란. 야릇한 붉은 빛이 아란의 얼굴에 떠돌았다.
지금 당장 아란의 몸 안으로 침입해 들어가고 싶은 걸 참으면서 제후가 말했다.
내가 어떤 여자 좋아하는지 말해줄까? 어떤 여자좋아하는데요? 그녀가 순진하게 되묻는다.
역으로, 아란의 몸을 아래에 두고 있는 제후의 얼굴은 짓궂은 헌 터의 표정이 된다.
오늘 밤 넌 죽었어, 라는 뜻이다.
나한테 저항하는 여자. 좋으면서도 싫다고 말해서 날 더 부추기는 여자. 수차례의 절정이 지났다.
몸과 몸이 먹고 먹혔다.
흥분을 부추긴 대가로 아란은 밤새도록 시달렸지만 한 번도 제후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을 거야. 오빠가 원하는 게 내 몸이라면 나한테 빠져서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 나한테 집착하도록, 그래서 나 외에는 누구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릴 거야. 새벽녘에 풋잠이 들었던 제후는 아란이 뒤척이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부스스한 얼굴로 시 계를 쳐다보니 아침 7시 30분, 샤워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든 지 겨우 세 시간이 지났다.
제후는 끄으응,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깜박여 눈 안으로 들어온 빛을 몰아냈다가 다시 실눈 을 뜨고 옆에 누운 아란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적어도 정오까지는 깨지 못할 것처럼 아란은 곤한 잠에 들어 있었다.
제후는 아란을 끌어다 안으면서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개켜 일어났다.
몸살이 난 것처럼 몸이 쑤시고 아팠다.
뜨겁고 격렬했던 정사(情事)의 보상이라 그것도 기꺼 운 제후였다.
시트가 눌렸다 제 자리로 돌아오면서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반짝하는 기 운에 욕실로 들어가던 제후가 되돌아 와 그것을 주웠다.
결혼반지였다.
제후의 손가락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는 녀석의 짝이다.
아란이 일부러 빼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도 어젯밤의 정신없는 상황에 빠트린 모양이다.
정신없는. 풋 그렇게 좋았나? 황홀한 기억을 되살리며 미소 짓는 제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가느다란 백금 링 안에 글자가 새겨져있는 게 보였다.
이니셜이다.
제후는 반지를 쥔 손을 힘주어 쥐었다가 펼쳤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간만에 찾아 온 나른한 행복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란이, 좋아하는 사람 있다.
두렵지만 보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을 차지한 사람을 알고 싶었다.
누구일까? 결혼반지에 이니셜을 새길 정도라면 굉장히 소중한 사람일 텐데, 한 번도 손가락에서 반지 를 빼지 않았던 건 결국 다른 사람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서였던 걸까? 제후는 가슴이 쓰렸다.
그러나 피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덧 땀이 고인 손바 닥에서 반지를 들어 빛이 잘 드는 쪽으로 들어올렸다.
첫 글자는 K였다.
JH? KJH. 뭐야, 내 거하고 똑같 무심코 내뱉은 진실에 제후의 눈동자가, 입이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돌려 세상모르고 잠이 든 아란을 쳐다봤다.
그녀는 말했었다.
내 심장이 누굴 위해 뛰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고. 야? 정말 나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 정말로 권 제후야? 콧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는 그녀가 대답할 리 없건마는 제후는 또 묻고 있었다.
야, 한 민준. 제후 놈 왜 저렇게 분위기 잡냐? 또 와이프랑 한 판 했대? 도서관 자리에 가방을 두기 무섭게 담배를 태운다고 나가는 제후였다.
책상에 쌓은 전공서 적들을 보며 한숨을 쉬던 서훈이 칸막이 사이로 몸을 제껴 민준을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19금애니 남들은 리포트 마감 맞추느라 골 빠개지는 이 때 얄밉게 돌아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저 자식 머리 좋고 손 빠른 건 알지만 너무 한 거 아냐? 머리 나쁘고 손 늦은 너하곤 다르게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내버려둬. 장난스런 무시로 서훈의 입을 막은 민준이었으나, 민준도 얼마 못가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 났다.
궁시렁 대며 책을 넘기던 서훈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넌 또 어디 가? 나도 담배나 한 대 태우려고 그런다.
금방 들어올게. 서훈이 콧방귀를 흥, 뀐다.
어이구! 자식이 저만 의리 있는 척 하고 있네. 제후 놈 걱정 되서 그런다고 말하면 내가 너 잡아먹을까봐 그러냐? 친구 사이에 별 걸 다 숨겨. 민준은 이해해줘서 고맙단 표시로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주머니에 든 담뱃갑을 확인한 다음 밖으로 나와 제후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았다.
제후는 도서관 밖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저 자식 오늘만 담배 한 갑이 넘는데 와이프 마음 알았으면 됐지 또 뭐가 문제인 거야? 불 좀 빌리자. 민준은 털썩, 제후 옆에 주저앉으며 담배를 내밀었다.
뻔히 쳐다보는 표정에 약간의 놀라움 이 깃들었다.
뭐해? 불 좀 빌리자니까. 허연 연기가 둘이 되었다.
새 담배의 3분의 1이 타들어가도록 아무 말이 없던 침묵은 기다 리다 지친 민준이 말을 꺼내면서 깨졌다.
잘 나가다 왜 그러냐. 사랑하는 여자 마음 얻은 걸로는 부족했어? 난 나를 잘 알아.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민준은 금방 제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뭐가 두려운 건데. 끝까지 가지 못할까봐?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던 여자들. 그 속을 헤매던 방황에서 찾은 한 사람. 그래. 너야, 아니면 아란이야? 버리게 될까봐 두려우냐 버림받는 것이 두려우냐, 민준은 묻고 있었다.
대답을 않는 것으로 보아 둘 다 인 것 같았다.
네 곁에 있으면 행복하지 못할까봐 겁나냐? . 미친 놈. 네 곁에 누구씨는 행복해서 죽을라고 하더라. 아란이 그 녀석 생각하는 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거 알지? 민준은 피다 만 담배를 밟아 뭉개며 말을 보탰다.
행복해 하고 있어. 네 눈에 보이잖아. 너도 알고 있잖아. 그 일 권 제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궁상떨지 말고 지금 하는 만큼만 해 줘. 넌 해 보지도 않은 놈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알려고 해서 알아진 게 아니라 눈에 보인다고 했잖아. 너희 둘 사랑하는 거 눈에 보여. 서 로의 곁에서 행복해하고 안타까울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모습들이 보여. 비로소 보이는 웃음이 서글펐다.
민준아 나 제후의 핸드폰이 삐빅 신호음을 냈다.
문자 메시지였다.
제후가 말을 하려다 말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누구야? 아란이? 어. 6시에 경상대 앞에서 만나기로 한 걸 깜박했네. 그러더니 제후는 이렇다 할, 양해도 구하지 않고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리고 수 분 후 다시 나와 정신없이 가방을 메고 경상대 건물이 있는 쪽으로 사라져버린다.
뭐야, 저 녀석. 얼음 왕자에서 공주의 똘마니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혼자 남은 민준이 바닥에 떨어진 제 후의 담배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어본다.
사랑을 하는 친구는 행복해 보였다.
한 달음에 도착할 듯 걸음을 재촉했던 제후는 아란의 모습이 보이기 불과 몇 미터 전에서 멈추었다.
아란의 곁에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저번에 본 채석이라는 아이는 아니다.
아란이 그 남자와 다정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도, 미소를 지어주는 것도 아니지만 발은 저절로 서버렸다.
처음 보았을 땐 무작정 손을 낚아 채 데려오고 친구 앞에서 무례한 키스를 퍼붓기까지 했는 데 지금은 소중한 그녀를 그리 대할 맘도 대할 용기도 없다.
하지만 잠시 동안 심장을 욱죄어 오는 통증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가지 말라고 겁먹은 머리가 명령을 내린다.
아란이 다른 남자와 얘기대화의 내용에 상관없이하는 모습만 보면 사라지는 자신감도, 언제 그녀가 그를 버리고 행실 좋고 반듯한 사람을 찾아 가버릴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커져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심스러웠다.
화를 낸다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제후의 마음을 알았던 듯 그 모습은 그리 오래 눈에 비치지는 않았다.
손짓을 해가며 대화 를 주고받던 남자가 목례를 하고는 사라진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인사를 받은 아란이 몸을 나무 그늘의 기둥에 기대며 이내 입 을 가리고 하품을 한다.
오빠. 무심코 돌린 시야에 제후의 모습이 들어오자 아란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부른다.
아까와는 다르게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제후는 아란에게 걸어갔다.
오래 기다렸어? 이제 6시 20분밖에 안 됐는데요, 뭘. 아란이 손목을 올렸다 내리면서 말했다.
제후는 아란이 오해하지 않도록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오면서 보니까 누구랑 얘기하고 있던데 그 사람 누구야? 아, 봤어요? 여자 친구가 우리 학교 학생인데 처음 와서 길을 모른다고 그러잖아요. 그럼 그렇지. 설마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 다른 말은 안 했고? 에? 아아니, 이상한 추파 같은 거 던지지는 않았냐고. 어휴, 이 병신! 이상한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바보같이 말은 왜 더듬는 거야. 제후는 속 으로 수도 없이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건 왜 물어보는 데요? 불현듯 민망해진 표정의 제후와 눈을 맞추던 아란이 눈을 깜박깜박 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가 난감해하며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보았다.
너넌 내가 다른 여자랑 얘기하고 있으면 좋냐? 이런! 예, 아니오의 단답형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그거야 당연히 그럼 됐어, 더 물어보지 마! 북 치고 장구치고 저 혼자 괜히 성질을 부리더니 제후는 혼자서 씩씩 걸어가 버린다.
아란 이 졸졸 뒤를 따라온다.
오빠 뭐 기분 나쁜 일 있었어요? 없었어. 근데 왜 나한테 화내요? 화 안 냈어! 그러니까 자꾸 토 달지 마! 하지만 지금 화내고 있잖아요. 서운함이 실린 음성과 함께 뒤를 따라오던 기척이 멎었다.
제후가 뒤를 돌아보자 아란은 머 쓱한 팔을 쓸어내리며 서 있었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굳이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큰 눈에선 금방이라도 떼구르르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고여 있었다.
아란이 다시 제후의 상태를 확인시켜주었다.
오빠 화내고 있다구요. 한숨이 나온다.
왜 소중히 여긴다면서, 좋아한다면서 난 왜 꼭 번번이 저 아일 울리고 마는 걸까. 이제는 정말로 사랑인데. 아란아.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는 그녀였다.
제후는 아란이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착각에 재 빨리 손을 내밀어 아란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 됐어요. 사실은 그게그래! 리포트 쓰다가 나왔거든. 모레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출하라고 교수가 닦달을 해서 아마 그것 때문에 신경이 좀 예민해져 있었나 보다.
알았어요. 아란은 잡히지 않은 쪽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럼 바쁘다고 얘기하지 뭐하러 나왔어요. 나 혼자서도 집에 갈 수 있는데. 관심도 없었던 리포트가 도움을 줬다.
제후는 그의 말에는 의심을 할 줄 모르는 아란과 300 페이지 분량의 전공서적을 탐독하고 사흘 만에 리포트를 제출하라는 교수에게 감사했다.
너 어린애잖아. 나 없으면 안 되는. 새록 고이는 웃음에 비로소 마음을 놓고 제후는 아란의 손을 잡았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울었으니까 배고플 거 아냐? 손가락 사이로 빈틈이 채워졌다.
조금 걷다 돌아보는 그의 웃음에 그녀도 붉은 눈을 하고 웃었다.
그것가지고 양이 차? 제후가 보기엔 먹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녁 사준다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리고 왔더니 아 란은 샐러드에만 손을 대고 식사를 끝낸다.
배불러요. 봐요. 아란이 손을 펴서 조금도 나오지 않은 아랫배를 톡톡 친다.
그래도 이거 먹고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되잖아. 정말 배 안 고프겠어? 먹는 걸로는 그렇게 욕심 안 나요. 나중에 우리 아이 가졌을 때도 그럴까봐 겁난다, 야. 애기가 뱃속에서 뭘 먹고 크겠냐? 그거야 모르죠, 그 때 가면 곰탕에 두 그릇씩 밥 말아먹을지. 투덜대는 제후를 아란은 쳐다보며 웃는다.
제후가 먹다 말고 고개를 든다.
왜? 아뇨. 그냥 오빠가 나랑 애기 낳을 때까지 살아줄 생각 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요. 아이 오빠 닮으면 예쁠 거에요, 그죠? 아란의 말을 들은 제후가 얼굴을 굳혔다.
살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거지. 부부는 동등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니까. 명문 S대의 학벌과 국내 건설회사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의 딸, 귀족적이고 아름다운 외모.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조건을 갖추고도 제후에 대해서는 항상 자기를 낮추어 보는 아란 이다.
자격지심이 아니라 아직 그의 마음을 모르기에 저러는 것이다 이해는 하면서도 제후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거슬린다.
네가 나에 비해 뭐가 부족한데. 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계약 따윈 이제 신경도 안 쓰고 있어. 그러니 네가 나에 대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오빠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 조건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만 생각하면 자신이 형편없어지고 초라해지는 기분이 뭔지 알 수 있어요? 내가 뭐? 제후가 물었다.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아? 사람 궁금하게. 있잖아요, 나 오늘 술 마시고 싶은데. 심드렁하던 제후의 눈동자가 반짝, 놀란다.
아란은 종업원이 접시들을 치운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면서 말했다.
오빠는 운전해야 되니까 관두고 나 마시는 거만 봐주면 안 돼요? 나 참. 마시려면 같이 마셔야지. 취하면 호텔 찾아서 하루 자면 되잖아.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제후가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 들른다는 호프집을 찾았 다.
8시가 갓 넘은 초저녁인데도 단골들이 많아 벌써부터 시끌시끌했다.
http://zzz.mainucc.me 어렵사리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뭐 마실래? 오빠가 정해요. 난 아무 거나 상관없으니까. 아란이 순진한 얼굴로 양 팔을 뻗어 소파를 짚고 다리를 모아 앉는다.
투명한 유리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가 반은 보이는 미니스커트가 골반에서부터 아슬아슬하게 감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내 핸드백으로 허벅지를 가리고 있던 게 생각이 났다.
비트 강한 댄스 음악 때문인지 어슴푸레 얼굴에 빛을 드리우는 조명 때문인지 늘 대하는 그 녀임에도 제후는 가슴이 떨린다.
조금만 옆으로 가 봐. 파트너가 있음에도 아란을 힐끔대는 몇몇 남자들의 시선이 영 못마땅했다.
저 자식들, 감히 누구 걸 넘보는 거야? 왜요? 우리가 남이냐? 같이 앉게. 아란이 안으로 물러 들어갔다.
제후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면서 손으로 얼굴을 안아 자 기 쪽으로 돌린다.
저항도 않는 입술이 닿았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향이 녹아 입 안에서 뒤엉킨다.
아란을 훔쳐보는 남자들에게 경고를 하려던 것이었지만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촉촉하고 도톰한 입술의 감촉에 취해버리는 제후였다.
키스가 깊어지면서 아란이 반응을 보였다.
팔을 제후의 목에 감고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등줄기의 움푹 파인 부분을 제후의 손가락이 훑자 아란은 허리를 휘면서 몸을 바짝 갖다 붙인다.
자잠깐만요, 오빠. 등이 푹신한 소파에 닿기 직전에 아란이 제후를 떠민다.
사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젠장, 뭐가? 입맛을 다시며 제후는 아란에게 기울였던 몸을 세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이 게 웬 떡이냐 쳐다보는 눈들이 많았다.
언제 웨이터가 다녀갔는지도 모르게 세팅 된 테이블과, 처음에는 수북하게 올라왔을 맥주 거품의 얇은 층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보 씹탱이들. 남 연애하는 거 처음 보나. 상황의 진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다가 제후는 마지못해 아란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녀 는 부끄러운 눈빛이었지만 창피해 하지는 않았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앉는다.
잘못 했어. 제후는 1700㏄ 용량의 차가운 맥주를 작은 잔에 따라 마시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쓰 윽, 핥아냈다.
첨부터 호텔로 가는 건데 잘못했어. 거기 가서 둘이 신나게 즐기는 건데. 다른 데로 갈까요? 아란이 온기가 느껴지는 손을 제후의 무릎에 얹었다.
자그마한 압박감에 제후가 마시던 잔 을 놓고 이게 무슨 뜻이냐는 듯 그녀를 쳐다본다.
하다만 거 계속 하고 싶지 않아요? 말귀를 알아들은 제후가 금세 쿡, 웃었다.
살다보니 요조숙녀 은 아란의 입에서 먼저 그걸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올 때도 있구나 싶었다.
좋아. 제후는 아란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경험자답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인간의 짧고 비밀 스런 사랑을 나누려면 어디가 좋은지는 숙지하고 있었다.
형, 나 거기 좀 쓸게. 주인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눈짓을 하고 제후는 아란을 데리고 좁은 문을 나와 2층으로 올라 갔다.
작은 문이 있었다.
제후가 손잡이를 돌리고는 아란을 들어가게 했다.
잠만 자는 곳인지 가구 하나 형광등 하나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키 높은 창문으로 흘러들 어오는 달빛이 야트막한 침대를 비추는 곳이었다.
달칵.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와 남자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밀애(密愛)의 장소를 찾은 것처럼 아 란과 제후는 잠시 눈을 맞춘다.
그가 다가온다.
붙잡히는 시선 속에서 천천히 긴장이 고조된다.
제후의 팔이 허리를 감싸오자 아란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하얀 손가락이 제후의 뺨을 스치고 머리칼을 만지다가 목젖을 스친다.
붉은 입술이 탐스럽다.
늘 품 안에서 익숙했던 향기가 어색하게 코를 스치고 떨리는 손가락의 감촉 아래로 부드러 운 피부는 사르르 밀려난다.
음악소리가 귓가에서 웽웽 멀어져가고 맞닿은 심장소리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한껏 달아오른 숨결이 하나가 된 몸을 얽어 묶는다.
뱅그르르 천장이 맴을 돈다.
젖은 숨소리가 방 안을 메운다.
절정의 신음소리가 공중에 부딪치고 야릇한 고통과 쾌감이 뿜어져 나온다.
무저갱(無底坑)의 암흑까지 떨어졌다가 천국의 광명에까지 이른다.
생명과 생명이 만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은 그것은 사랑을 잉태한다.
꿈인 듯 환상인 듯 시간이 멈춘다.
앞으론 종종 술 마시러 와야 되겠는 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후가 하는 말이었다.
한바탕의 격렬한 운동(!)으로 땀을 빼고 난 다음에 마시는 맥주 맛은 더없이 좋았다.
언제는 호텔 가서 둘이 즐기자면서요. 제후가 쳐다보자 아란이 얼른 눈을 돌리고 입을 다문다.
그녀의 하얀 목에 남은 키스마크가 조금 전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는 거야, 싫었다는 거야? 흔하지 않은 아란의 새침한 눈빛에 제후가 운전을 하면서 웃었다.
앵 토라지는 입술이 귀엽 기만 했다.
뭐나쁘지는 않았어요. 차마 대답을 못하겠는지 미적미적, 말을 돌리지만 선수답게 제후는 속뜻을 낚아 채 낸다.
괜찮았으면 집에 가서 한 번 더 할까? 카메라를 샀다.
원하면 바로 찍어서 즉석에서 볼 수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웨딩 앨범 말고는 볼 만 한 사진을 채워 둔 앨범 하나 없다는 게 제후의 이유였지만 빛나는 두근거림으로 자리해가는 아란의 모습을 잃어버리기는 너무 아까워서 그랬다.
제후는 자석이 달린 예쁜 팬시 제품을 사다가 냉장고에 사진을 붙여 놓기 시작했다.
막 일 어나서 눈을 부비는 모습,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터는 모습이며 놀이동산에서 재영과 놀아주는 모습 등, 제후의 손에 서는 카메라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진 찍는 걸 싫다고 손사래를 젓던 아란도 점차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다루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한 번은 술을 마시고 들어와 퉁퉁 부은 제후의 얼굴을 몰래 찍었다가 냉장고에 붙여놓고 잠 이 깬 그에게 보여주면서 깔깔대기도 했다.
길을 지나다 만난 귀여운 아이들이나 강아지들을 찍기도 했지만 그들 사진 속의 주인공은 거의 상대방이었다.
사랑할 운명으로 만나게 된 것처럼 뒤돌아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넌 언제부터 내 주위를 맴돌았을까. 내가 모르던 시절의 넌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모습으로 나를 사랑했을까. 어쩌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제후는 아란을 더듬어 봤지만 어느 한 조각 기억 속에도 그녀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란은 가슴에 안고 다니는 전공서적을 치우고 교복을 입혀놓으면 여고생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풋풋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화려한 옷과 세련된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해 남자를 유혹할 줄도 몰랐고 마음에 드는 남자 에게 먼저 접근하는 여자들의 화끈함은 흉내 내지도 못했다.
결혼 전, 그런 여자들만을 찾아 부담 없이 즐겨왔던 제후 쪽에서 보면 눈에 띄지 않았던 것 도 당연했다.
설사 그녀를 알았다 하더라도 처녀를 망가뜨린 책임을 떠맡을 걸 염려해서 거절했을 것이다.
제후는 간혹 등 뒤를 맴도는 아란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곧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 못하고 외면하는 서글픈 눈빛을. 아란아 난 너를 확인해 보고 싶다.
내게 손 내민 나를 찾아올 용기를 내어주길 원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가까운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해주길 원한다.
너를 위해 심장을 송두리째 내어버린 내 사랑을 알아주길 원한다.
오늘 집에 못 들어온다구요? 벌써 술에 취했는지 전화기 너머 제후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않았다.
아란은 시계를 봤다.
사 람을 잠도 못자고 기다리게 하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야 연락을 하더니 오늘은 못 들어온단다.
말했잖아. 제대하는 친구 놈이 있어서 한 잔 하기로 했다고. 그런 말 들은 적 알아들었으면 문 잠그고 먼저 자라. 끊는다.
오 뚜뚜뚜 반복되는 신호음을 듣다가 아란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썰렁한 침 대로 혼자 들어가 누웠다.
차가운 감촉의 시트에 한숨이 나왔다.
근래 들어 이런 일이 늘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방랑벽이 도진 것인지 제후는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오고 아예 그 다음 날 저녁때나 얼굴을 보는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여지없이 시큼한 술 냄새가 났다.
여자의 향수 냄새도 희미하게 났다.
그러나 아란은 무엇 하나 물어보지 못하고 숙취에 시달리는 제후에게 꿀물을 타다 주고 해장국을 끓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하나가 상처였고 고통이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적응해서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던 걸까? 어느덧 은 아란에게 싫증이 나버린 걸까? 심장을 쿡쿡 쑤시는 통증이 심해져 와도 약이 없었다.
그걸 달래줄 사람은 나 몰라라 밖으 로만 돌고 있는데다 우리 이렇게 살고 있다고 어디 하소연할 구석도 없는 아란이었다.
친구인 미진과 승원에게는 입 밖에 내기에도 창피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동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안 봐도 뻔했다.
어차피 일방적인 사랑이다.
얼마 못 가 혼자가 될 것을 알고 시작한 결혼이었다.
다정한 포옹도 키스도 없는 무료함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 생활에 젖어들 것을 예상하고 덤벼든 모험이었다.
신선함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처녀였다는 것, 아직 누구의 손도 닿지 미지의 개척지가 당분간은 호기심을 끌 수 있지만 일단 단 맛을 보고 나면 좀 더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떠나는 게 남자란 동물의 심리다.
이제 그 때가 온 거라고 아란은 생각했다.
노력을 해서 그의 마음에 들려는 시간이 무의미 하지 않았지만 둘 중 하나는 결정해야 했다.
명색뿐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제후처럼 새로운 사람을 찾아보던지 아니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착한 아내이자 진정한 연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지. 무너져선 안 돼. 포기할 수 없어. 아란은 두 번째의 결론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매일 밤을 새다시 피 하며 곁을 지켰다는 말을 시할아버지 권 회장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가 그녀에게 아주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게 비록 가능성이 1%밖에 안 되는 일이라도, 제후를 위해 견디어 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닭 쫓던 개 마냥 다른 여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
싸워야 할 때가 온다면 싸울 것이다.
. 아란은 침대 머리맡의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으로 확연히 떠오르는 영상에 그 래도 눈물이 났다.
야, 그만 마셔! 고급 주점을 찾아놓고 아가씨들도 없이 심심하게 술을 마시던 세 사람이었다.
열 개가 넘는 맥주병을 해치운 걸로도 모자라 독한 위스키를 병째 들어 마시고 있는 제후의 손을 서훈이 잡았다.
너 정말 제수씨한테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내버려 둬. 저도 참기 힘드니까 그렇지. 집안에 고이 모셔둔 아내를 두고 용광로처럼 뜨거웠다가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가웠다가 변 덕을 부리는 제후의 마음을 아는 친구들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천천히 다가온 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친구가 안 돼 보이기도 했고 고작 연극만으로도 이렇게 못 견뎌하는데 만약 두 사람을 진짜로 떨어트려 놓으면 무슨 일 이 생길까 은근히 궁금한 생각도 들었다.
서훈이 결국 술병을 빼앗았다.
그러게 도망도 안 갈 여자 두고 이런 바보짓은 왜 해? 은 아란보다 네가 먼저 술독에 나 가떨어지겠다.
무서워. 제후가 말했다.
술기운을 빌린 서글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투였다.
그 녀석 시험해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이대로 끝나버릴까 무서워. 그 녀석이 좋아하는 사람이 권 제후가 맞는지 확실히도 모르면서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싶고 나를 못 견뎌 그만두자고 매달리는 모습 보게 될까 봐 혼자 흐르는 시간이 무서워 제후야 두 친구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서훈이 침묵을 깼다.
원래 누굴 좋아한다는 건 짝사랑일 때보다 마주볼 때가 더 두려운 거야. 상대방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 하나 하나에도 신경 쓰이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누구나 다 그래. 민준이 거들었다.
서훈이 말이 맞다.
싸우는데 꼭 정면 돌파를 하라는 법은 없잖아. 과정이야 어떻든 이기기 만 하면 된다는 식도 나쁘지만 내가 보기에 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널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을 테고 아 무튼 서로에게 시간을 둔다는 거 너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제후가 곁눈으로 친구들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란이도 아마 너랑 같은 마음일 거야. 하지만 널 실망시키는 일은 안 할 거다.
그 녀석 순진한 만큼 오래 가거든. 한 민준. 왜? 너 정말 아란이 좋아한 거 아냐? 민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새끼. 잘 나가는 인생에 초 칠 일 있냐? 그 때 말했잖 아. 그거 어디까지나 너희 할아버지 부탁이었다고. 진짜 아니야? 글쎄. 다소 야비한 웃음이 민준의 입가에 떠올랐다.
제후와 서훈이 동시에 민준을 향한다.
만약 두 사람을 잘 되게 하는 게 아니라, 헤어지게 만들라는 부탁이었으면 배는 신났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었다.
솔직히 권 제후 것만 아니었어도 좋아라 망쳐버렸겠지. 내 품에서 저항하며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 는 여자를 짓밟을 때의 짜릿함 너희들 그거 알아? 하긴. 남의 것을 빼앗을 때의 즐거움은 기막히지. 서훈이 말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농이라는 걸 알기에 제후도 가만 듣고만 있다.
기왕지사 다 끝난 얘기니까 하는 말인데 만약 은 아란이 조금만 틈을 보였어도 나 그 날 로 작업 들어갔다.
근데 그 녀석 냉정하더라. 흔들리는 빛 하나 없이 쏘아 보면서 내가 무얼 원하든 절대 자기한테서 가져갈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 아 이 얘긴 저번에도 한 번 했었지? 대답 없이 잔을 비우는 제후를 보고 서훈이 민준과 주거니 받거니 결론을 지었다.
은 아란은 용기가 없어 숨기는 거지만 너는 자존심 때문에 버티는 거다.
까짓 사랑한다는 말, 먼저 하기가 그렇게 어렵냐? 그러자 듣고만 있던 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취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말 짱한 얼굴과 걸음을 하고서 문을 나서려다 돌아봤다.
쉬운 게임일수록 최선을 다해 즐기는 거다.
알겠냐, 이 바보들아? 닫히는 문 사이로 유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가 멀어졌다.
휘파람? 설마 이 녀석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민준과 서훈이 잽싸게 튀어나갔지만 제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들 에게 남은 것은 50만원이 넘는 계산서 뿐 이었다.
물으나마나 속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권 제후 이 개새끼! 내일 학교에서 만나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약이 오른 서훈의 목소리가 가라오케 반주로 시끄러운 주점 한 가운데를 잘랐다.
의심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놓고 말을 하는 적은 없었지만 등을 보이면 들리는 소문들은 아란의 불안을 부추겼다.
누구누구랑 어디에서 같이 있었네, 술을 마시고 진한 키스를 하고 어디에서 애정행각을 벌 인다 하는 소문들이 점점 그녀의 귀를 따갑게 했다.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후를 믿지 못하는 마음은 커져가고 그가 그녀의 곁을 비우는 시간들도 늘어갔다.
밤에 한 침대에 누워도 먼저 자버리기 일쑤인 제후를 보며 아란은 그가 그녀보다 테크닉이 뛰어난 여자에게서 그것까지 해결하고 들어오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거부당하는 여자의 마음이란. 아란은 마치 그녀의 사랑을 시험이나 하듯 냉대하는 제후의 행동들이 버거웠다.
처음에 만 났을 때처럼 말을 걸기 전에는 입도 벙긋 않는 그의 태도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투정 한 번 부릴 수 없었다.
혹 요즘 왜 그러냐고 말을 꺼냈다가 버림을 받을까봐 내 하는 일에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듣게 될까봐 겁이 나는 아란이었다.
완전 죽을 상이구만. 얼굴 좀 펴, 은 죽순. 점심도 굶고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아란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초여름 창 밖을 채우는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는 그녀와는 관계가 멀었다.
밥도 안 먹고 말야. 너 단식 투쟁 하냐? 아니면 다이어트? 좌청룡 우백호처럼 아란을 가운데 두고 앉은 두 친구가 번갈아 말을 꺼낸다.
왜에~나 피곤해. 쉬고 싶어. 바람 난 남편 덕에 마음고생 하는 네 속은 알겠다만 이래서야 어디 남의 남편 빼앗아간 기집애들 요절이나 내겠어? 승원의 말에 아란이 벌떡 얼굴을 든다.
쳐다보는 눈에 원망이 서렸다.
가뜩이나 심난해 죽겠 는데 왜 건드냐는 표정이다.
몰라! 다른 여자들이랑 밥을 먹든 죽을 말아먹든 알아서 하라고 해. 난 이제 권 제후고 뭐고 신경 안 써.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은. 은 죽순 니 별명이 누구 때문에 지어졌는데? 미진이 가볍게 아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 지금 여기 퍼질러 앉아서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촉즉발! 까딱하단 니 잘난 남편 딴 여자한테 빼앗기게 생겼단 말이다.
무슨 소리야? 이런 말, 해도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구를 위해서니까 주위를 둘러보는 척 목소리를 움츠린 미진이 입을 열었다.
학생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제후 가 전화 통화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오늘 밤에 클럽에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용이야 물론 하룻밤의 상대를 구해 화끈하게 놀아보자 뭐 그런 것이었다.
얘기를 듣던 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할수록 도가 지나치다.
사람들 많은 식당에서 그 런 말을 했다는 건 우리 결혼 파탄 났다고 자랑하는 것 밖에 안 됐다.
이제 너랑은 그만두고 싶다고 공고하는 거였다.
괜찮아? 어? 어.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으로 아란은 웃었다.
아무리 사정을 다 안다고 해도 친구들 앞에서 울 음을 터트리는 낯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우린 항상 같이 있을 거야. 언제든 널 지켜줄 거야.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그리고 나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오빠 이럴 거면 약속은 왜 했어요? 남자의 약속이란 믿을 만한 게 못된다는 거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니면 그냥 해 본 말에 지질구리하게 매달려 있는 날 떼어놓고 싶어서 그러는 거에요? 이도 저도 아니면 즐길 만큼 즐겨봤으니 내가 귀찮은 거에요? 나 먼저 간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는 아란을 보며 남은 미진과 승원이 한숨을 쉬 었다.
야, 아무래도 말하지 말 걸 그랬나봐. 나중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 입으로 들었으면 더 충격 받았을 거야. 제후 선배랑 헤어지 든 계속 붙어있든, 그것 때문에 심장이 터지도록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해도 문제를 피하는 것보단 나아. 전부 아란이가 감 당해야 될 몫이잖아. 우린 잘 한 거야. 그래도 아란이가 너무 가엾어. 선배는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난들 아냐. 평범한 사람 속도 모르는데 능력 좋은 바람둥이 속을 우리 같은 범인이 어찌 알겠어? 미진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예상한 대로 늦는다는 전화 한 통 없는 제후였다.
밤 10시, 아란은 맥없이 쳐져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하루 종일 굶 은 데다 생각까지 많아 현기증이 잠시 일었다가 가셨다.
지금까지 하고 똑같이 행동해선 안 돼. 이렇게 머뭇거리다간 오빠를 정말 놓쳐버리고 말 텐 데 언제까지 부부라는 이름에 기댈 참이야? 기다리기 전에 달려가는 거야. 저 쪽에서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고 덤벼드는 거야. 아란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샤워 코롱을 뿌려주고 옷장을 뒤져 최대한 남자들의 눈 길을 끌만한 옷을 골라 입었다.
마지막으로 화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마친 아란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앳되고 청순 한 소녀는 어디로 사라지고 섹시한 자태를 뽐내는 여자가 거울 속에서 그녀를 보고 서 있었다.
이게 나야? 아란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훑어보았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렀다.
자신도 꾸미기만 하 면 이렇게 색다른 매력을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꽤 괜찮네. 아참, 시간! 마음이 급해선지 부지런을 떨었는데도 11시였다.
문단속을 마치고 집을 나서는 아란의 얼굴 에는 이제 설레임마저 깃들고 있었다.
아저씨, 강남역이요! 택시에 오른 아란이 숨 막히게 외쳤다.
야, 권 제후. 저 여자들 어떠냐? 음악을 타고 여자들이 흘러 다녔다.
칼을 댔든 자연산이든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자랑하며 사냥꾼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들이. 난 됐어, 너희나 가서 놀아. 제후는 시큰둥하니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아란을 자극하려는 목적 없이 순수하게 우정을 다지기 위해 모인 자리였고 그러니만큼 다른 잡념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쳇, 남자들끼리 무슨 재미야. 아리따운 꽃들이 나 좀 따주십사 기다리고 있는데. 됐다, 됐어. 이 자식 결혼한 거 모르냐? 임자 있는 놈들은 아무리 와이프가 순해 빠져도 몸을 움츠리잖아. 아무렴 어떠냐. 여기 올 것도 아닌데 하루쯤 고리를 풀어버린다고 해서 무슨 죄가 되겠 어?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던 제후의 친구들 중 하나가 바깥에서 당겨지는 문에 시선을 둔 다.
여자 일행이 없는 여자가 클럽으로 들어온다.
타이트한 질감의 블랙 미니 드레스. 허벅지 중간 슬릿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 고혹적인 눈빛과 글로시하게 빛나는 도톰한 입술. 그녀가 지나가자 남자들의 시선이 따라 묶인다.
누구를 찾는 듯 둘러보던 여자는 빈 자리를 찾다가 웨이터가 있는 라운드 바에 앉는다.
우와저 여자 끝내주는데? 실크 같은 윤기의 머리칼을 자랑하며 그녀가 주문한 칵테일은 컬러로 보아 진 라임이었다.
제후와 친구들이 앉은 자리와도 멀지 않았다.
야, 그렇게 도 닦지 말고 눈요기라도 해라. 친구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자 제후는 마지못해 술잔을 테이블에 놓고 고개를 든다.
이 미 다섯 잔의 위스키가 들어간 다음이었다.
Linkin Park의 을 따라 발장단을 맞추던 제후의 몽롱했던 눈이 천천히 커진다.
그녀다.
권 제후의 아내 은 아란이다.
저 녀석 왜, 너 아는 여자야? 어찌 된 일일까. 숨이 넘어갈 듯 아름다운 저 모습은 내게 마치 도전을 해 오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남자 들 속에서 날 차지할 수 있으면 차지해보라고 약을 올리는 것 같다.
그 날 밤 학교 앞 호프집의 불조차 들어오지 않던 작은 방에서 그녀를 가졌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아란은 모르는 사람처럼 제후를 바라보고 있다.
내게는 당신도 이 남자들처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가 외면한다.
애가 탔다.
지금 연극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그녀의 외면에 제후의 심장은 포위망에 갇힌 한 마리 맹수처럼 드세게 고동친다.
제후가 일어섰다.
그러나 아란이 더 빨랐다.
칵테일 잔을 놓고 시선을 돌려 일어나더니 그에 게 다가온다.
차랑, 제후의 눈앞에 떨어지는 그것은 열쇄였다.
이어 아란이 테이블을 짚고 몸을 수그리더 니 제후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와 속삭임을 남기고 멀어진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 흔적이 남지 않은 빨간 립스틱이었다.
제후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아란의 온기와 향기가 남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제후는 열쇄를 쥐고 일어났다.
그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잠잠한 소란의 한 가운데로 그녀는 벌써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마치 순간적으로 환상을 보았던 것처럼. 야, 너 안 나가 봐도 돼? 방금 그 여자 너한테 마음 있는 것 같던데. 선택받은 자에 대한 축하였다.
오늘 동석한 이 녀석들은 중학교 때 이민을 떠났다 돌아온 지 고작 이틀 만에 제후를 만나는 거였다.
당연히 방금 그 여자가 권 제후의 아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환상이 아니었다.
아란은 정말 여기에 왔었고 그에게 열쇄를 주고 나갔다.
어, 가야지. 하지만 어디로? 만약에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면, 다시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열쇄를 주고 떠나버린 거면 어떡하지? 그런 이유 때문에 제후는 클럽을 나와서도 헤매고 있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 좀 더 자 극적인 즐거움을 노리는 젊음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드는 유흥가에서 아란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찾아볼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후후 길이라도 잃어버렸어요?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게. 낯익은 웃음소리가 제후의 귓전에 가까워 온 건 그 때였다.
제후가 뒤돌아섰다.
그녀가 있었다.
아란아. 아란이 고개를 저어 제후가 다가오는 것을 막으며 말했다.
검은 머리칼이 하얀 손가락 사이 에서 바람을 따라 자르르 쏟아졌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그러니까 계획적이었다는 뜻이다.
제후가 이 클럽에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아란은 시간에 맞 추어 나타났다는 말이다.
뭘? 언제까지 이럴 건지, 이유가 뭔지. 클럽을 나오자 아란을 쳐다보는 시선들은 더 노골적이 된다.
그들을 경계하는 제후의 눈빛 도 덩달아 날카로워진다.
아란이 나름대로 차려입은 드레스와 하이힐도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제후였다.
어울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어울려서. 대체 누구 좋으라고 저런 옷을 입고 나온 거야?! 그러나 그가 어디 그녀를 나무랄 형편이던가. 친구들과 어울릴 목적이었다지만 원 나잇 상 대를 찾으려는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클럽에 자신을 http://pon10.com 노출시킨 건 제후였지 아란이 아니었다.
갈 때 되면 알아서 갈 텐데 웬 호들갑이야? 그래도 지기 싫은 자존심에 기가 살았다.
아, 그래요? 아란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약간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런 데서 서성대지 말고 잘 됐네요, 그럼. 사실 나도 나온 김에 놀다가 들어가려는 참이었거든요. 오빠가 언제 집 에 들어올지는 모르지만 나보다는 빠를 테니까 열쇄나 잘 맡아줘요. 야, 임마 은 아란! 미진이 말로는 홍대 앞에 괜찮은 카페가 하나 있다던데 거기나 가볼까나 택시! 이 쪽을 향해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드는 아란의 팔을 제후가 재빨리 잡아 돌려세운 다.
알았어, 알았다고! 같이 집에 들어가면 될 거 아냐!! 왜요? 누가 집에 가자고 했어요? 우리 따로 따로 놀자니까요.아란은 제후의 손을 잡아 뿌리친다.
이거 놔요. 파트너가 있으면 서로 불편 은 아란! 정말 화가 났다.
이쯤에서 지는 척 물러서야 될 것 같았다.
너 집에 가서 두고 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더라. 비록 그 웃음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아란은 제 후의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목적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속으로 웃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후는 내동댕이치다시피 아란을 쓰러트리곤 몸을 덮쳤다.
아아파. 가만있어!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난폭한 손길을 따라 드레스가 찢어진다.
새하얗게 숨을 쉬는 하얀 피부와 샤워를 끝낸 몸에 서 느껴지는 샤워코롱의 향기가 달빛만 간간히 새어드는 침실을 아찔하게 만든다.
한 입 베어 물면 피가 배어나올 듯 붉은 입술과 유약하게 떨리는 눈꺼풀. 이 모습을 대하 는 게 얼마만인지 제후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바로 옆에 그녀를 두고도 손 하나 까딱 못했던 밤이 며칠이나 되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 안에서 굶주리고 굶주리다 겨우 먹이를 준 맹수에게서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갈 때의 반응, 지금 아란을 대하는 제후 의 마음이 꼭 그랬다.
약한 자를 짓누를 때의 쾌감과 배고픔을 채워지면서 만족스러운 그였다.
아아아 학! 아란에겐 고통이었다.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짓이겨지면서 가슴에선 피눈물이 나고 있었다.
언젠가 권 제 후에게 은 아란은 사랑 없는 섹스의 상대이며 욕구배출의 도구라고 했던 말들이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
그 말이 옳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이 사람은 나를 아껴주는 게 아니라 집착이고 온갖 더러 운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할 뿐이다.
필요가 없어지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리고 때에 따라선 영원히 폐기처분 될 수도 있는. 감정이 오락가락 변덕을 부린다.
어제 밤, 제후를 찾아 나설 때만 해도 하는 데 까진 해보자고 희망을 가졌었는데, 낯선 곳의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그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다.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의 몸마저도 이처럼 낯설고 껄끄럽다.
그가 낯설다.
어디 가? 몇 번의 행위 끝에 제 욕심만을 채우고 지쳐 나가떨어진 제후가 등을 보이고 일어나는 아란 에게 물었다.
씻으러요. 아 그리고, 전 커피 한 잔 마시고 잘 거니까 오빠 먼저 자요. 욕실 문으로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사라진다.
곧 이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 가 요란했다.
근 30분이 넘도록 제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욕실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릴 없이 피워 물 은 담배연기가 매캐하니 후각을 자극하면서 방 안에 차오르자 그게 싫어 제후는 대충 청바지만 구겨 입고 침실을 나와 버린 다.
아란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뭐 뀐 놈이 성낸다고 죄도 없는 그녀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해 버렸다.
후우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생각해 본다.
눈빛으로만 느꼈던 사랑을 그녀의 입으로 확인 하고 싶어서 극단적인 방법을 써 본 거였는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 아일 다치게 만들려는 게 아니었는데. 왜 안 자고 나왔어요? 찌르는 듯한 시선과 목소리가 등에 와서 박힌다.
설마하니 나한테 사과를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는 왜 해? 미안한 마음과는 반대의 감정을 담아 퍼뜩 튀어나오는 대답에 거실에는 잠깐 침묵이 흐른 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서는 비누향기. 오빠나 보기 싫죠? 눈치도 없이 친구들이랑 노는 데 끼어들어서 판이나 깨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찌푸린 인상의 제후가 돌아섰다.
웃으려던 입에서 망설이는 한숨이 나오더니 아란은 더듬지 도 않고 제 속을 토해낸다.
말 그대로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된다는 뜻이에요.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거에 요. 내가 원하는 것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불길한 기운이 섬뜩하니 제후의 심장을 가른다.
얇은 가운으로 감싼 팔을 쓸어내리며 아란 이 시선을 아래로 깔아 돌린다.
내가 여기서 나갈게요. 그녀가 말했다.
안 보고 살려면 둘 중 하나는 나가야 되는데 오빠는 이 집 주인이라서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들어온 사람이 나가야죠. 아란아! 한 걸음 다가서는 제후를 피해 두 걸음을 물러나며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알죠? 부부는 한 사람 노력만으론 안 되는 거에요. 할아버지 할머니 과분한 사랑을 봐서라도, 재벌가 손자며느리라는 타이틀이 탐나서도 견뎌보려고 했는데 아란은 농담처럼 말을 해놓고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떼었다.
그런데 안 되겠어요. 오빠는 나한테 참 힘든 사람이에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열 배 스 무 배는 힘들어요. 어깨가 무겁고 아파서 견디지를 못하겠어요. 나 이제 겨우 스무 살이잖아요. 억지로 끼워 맞춘 웃음 속에서 응어리진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가장 하고 싶었 던 말 나를 보는 그 눈에 해주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도 한낱 과거로 떠밀려지려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착한 아내 노릇하는 건 나한테 무리였나 봐요. 미안해요. 아란이 웃는 듯 우는 듯 말을 마쳤다.
이건 아니다.
그 빌어먹게 길었던 주례 할아버지의 주례사와 검은 턱시도, 하얀 웨딩드레스의 서약에 맹 세컨대 죽음 이전의 헤어짐이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내 심장을 가진 채 나를 등지고 다른 남자와 인생을 찾아보겠다니 말도 안 된다.
나더러 심 장 없이 인형처럼 살아가라니 이 아이는 정신이 돌아도 단단히 돈 거다.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다.
내가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거다.
그럼 미안할 짓을 왜 해! 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면 하지 말란 말야! 안 하면 되잖아! 적반하장이었다.
지금 누가 잘못해놓고 누가 큰 소릴 치는지 모르겠지만 제후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아란의 입에서 그만두자는 말이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제발 제후가 털썩, 아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란의 눈동자가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다음에 쏟아놓은 말들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발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사랑해 아란아. 내가 너 사랑한다고 해도 안 되겠어? 아란은 저주를 받은 사람처럼 두 눈과 입이 동시에 굳었지만 믿을 수 없는 진실들로 심장은 울먹이고 있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민준이한테 너 좋아하는 놈 있다는 소리 듣고 혹시나 나한테 지쳐 그 사람한테 가버릴까 봐 한 달이 넘게 너 모르게 앓았어. 아란아 나 너무 늦은 거야? 네 반지 속에 새겨진 내 이름 석 자보다 더 널 사랑 한다고 해도 이제는 가버릴 수밖에 없어? . 네 마음 확인하고 싶어서 일부러 못되게 굴었다고 하면그래도 용서 안 할 거야? 아란의 머리속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결혼반지의 이니셜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도무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빠가 나를 사랑한다니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라니 이런 일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꿈에서조차 희망 버리고 언젠가 떠나는 뒷모습 바라볼 사람 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내게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오빠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애원이었다.
그 명성 자자한 얼음왕자가 지금 자그만 여자애에게 애원이란 걸 하고 있는 거 다.
제 멋대로에 걸핏하면 바람처럼 나돌아서 상처만 주는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 받아주면 안 되겠어? 동정이라도 좋으니까 내 곁에서 지켜주면 안 될까? 그의 눈동자 속에 아련한 사랑으로 그려지는 그녀가 보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같은 마 음으로 힘들었을 사람을 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란 자신도 제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란은 눈물을 훔쳤다.
오래전 가슴 한켠 에, 꼭꼭 숨겨놓은 사랑이 드디어 주인을 찾았다.
아니에요. 부부 사이에 용서 하고말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냥 나도 나도, 잠시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 건데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진짜로 사랑하면 그걸로 된 거잖아요우리 서로 용서 하고 살면 되는 거잖아요. 아란이 시선을 낮추어 제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주보는 두 눈 속에 사랑이 고였다.
그래. 우리 진짜로 사랑하면서 살자. 그에게도 오랜 시간을 더듬어 품에 안은 사랑이었다.
제후는, 비로소 한 맘이 된 행복을 감 추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아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 내 스물 네 살의 봄을 말도 안 되는 짝사랑으로 온통 망쳐버린 내 아내를 그런 너를 사랑해. 오빠 나 이제 슬픈 일 없는 거죠? 이제는 그 눈 다른 사람 향할까봐 조바심 낼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거죠? 나도 오빠 사랑해요. 억센 포옹으로 아란을 품에 가둔 제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겹쳐졌다.
눈을 감는 아란의 얼굴에도 평온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요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 지금보다 조금만 더 행복해져요. ************** 두 달 간의 여름 방학을 앞 둔 기말고사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날, 제후는 권 회장에게서 집에 좀 들르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이나 모레 쯤 갈게요. 며칠 동안 거의 밤 새가면서 시험 봤더니 피곤 해 죽겠어요, 할아버지. 후아~함. 하품을 털털 틀어막으며 할아버지를 부르는 제후의 눈가에 졸린 눈물이 맺혔다.
아무리 피 곤해도 씻고 나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아란의 등쌀에 밀려 샤워기 밑에 있다가 나오긴 했는데 몽롱한 정신은 도무지 풀릴 생각을 않는다.
저녁 바람마저 솔솔 불어와 눈꺼풀을 유혹한다.
아란이는? 샤워하고 나와서 냉장고 앞에 있어요. 저 과일 깎아 준다고요. 바꿔 드려요? 훌쩍 맑아진 손자의 목소리에 권 회장은 허허 웃었다.
아니, 됐다.
모처럼 둘 다 쉬는 모양인데 늙은이가 방해해서야 쓸까. 전화 이만 끊으마. 예. 그럼 모레 뵐게요. 전화를 끊고,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데 잠시 후에 아란이 과일 접시를 들고 나왔다.
손깍지에 머리를 지탱하고 있던 제후가 시선을 치켜들어 어린 아내를 보다가 씨익, 웃음을 베어 문다.
저 호리호리 가냘픈 허리와 한참 달콤하게 물이 오른 복숭아처럼 차오른 가슴을 보고 있자 니 응큼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밤이건 낮이건 틈만 나면 야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바쁜 손자 마음을 할아버지 가 아시고 통화를 짧게 끝내셨나 보다.
왜 웃어요? 아냐, 아무 것도. 아란은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어깨가 훤히 드러난 슬리브리스에 면으로 된 핫팬츠를 입고 있 었다.
그녀에게 이런 차림이 허용되는 곳은 집과 가까운 슈퍼에 갈 때 만이다.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것도 싫지만 다른 남자들 눈에 튀게 하고 다녀도 싫다는 제후의 귀여운 고집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뭐라세요? 아란이 예쁘게 모양을 낸 과일 접시를 놓고 옆에 앉자 제후는 냉큼 머리를 들어 아란의 무 릎을 베고 눕는다.
너 보고 싶으시데. 그래서 시험 때문에 한 이틀 쉬고 가겠다고 했어. 흐음정말, 마지막으로 뵌 때가 생신 때니까 오래 되기는 했어요, 그렇죠? 그래. 아란은 씨 없는 포도 하나를 터트려 알맹이를 제후의 입 안으로 넣어주면서 쉴 새 없이 입 을 움직인다.
어젯밤에도 그가 시험공부 하는 걸 도와주다가 덩달아 밤을 샜는데 피곤하지도 않은 것 같다.
아니면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참 많았던 걸까. 제후는 손을 뻗어 아란의 뺨을 감싸본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인다.
클럽으로 제후를 찾아갔던 그 날 이후 아란은 한층 밝아지고 말도 많아졌다.
일부러 쫓아와 서 귀찮게 하지도 않고 그를 조심스레 대하는 태도도 여전했지만 거리감은 훨씬 줄어있었다.
오빠? 제후가 아란의 뺨에 닿았던 손을 내리면서 천천히 일어난다.
몸은 한 번 누웠다 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피곤한데 ? 왜 널 보고 있으면 잠이 깨 버리지? 막 배도 고프고. 배고프면 과일 아니, 그 거 말고.제후는 두 팔을 벌려 짚고 아란에게 몸을 기울이면서 쿡, 웃었다.
아 란이 너 말야. 시험 핑계 대고 며칠 동안 나 독수공방 시킨 줄 알아? 안 되는데 뭐가? 있잖아요, 나 사실 오늘부터 그 날 뭐야?! 땅이라도 박차고 일어날 듯 제후의 눈꼬리가 대번에 옆으로 좌악 찢어진다.
이번엔 아란이 다문 입술에 손을 가져다대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보지만 이내 소리가 새어나오고 어깨까지 들썩인다.
쿠쿡쿡아하하하하!! 뭐뭐야, 너 왜 웃어? 오빠가 귀여워서요. 사실 나 오늘부터 그 날 끝났다고 말하려고 했는데뭐에요, 이거. 내 가 꼭 오빠 놀린 것처럼 되어버렸잖아? 아란이 웃다 맺힌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낸다.
당황한 기색의 제후가 얼른 표정을 가 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그럼 오늘부턴 가능한 거지? 안 그러면 샤워 시간이 그렇게 길었겠어요? 보일 듯 말 듯 눈꼬리에 걸리는 웃음에 심장이 울렁인다.
제후가 과일 접시를 저 쪽으로 밀 어내고는 아란의 어깨를 안아 입술을 포갠다.
포도 냄새가 향긋하고 촉촉하다.
깨끗이 빨래를 하고 오늘 하루 햇살을 받은 따뜻한 천, 얇고 보드라운 감촉의 면 담요가 아 란의 등에 닿는다.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던 손을 가만히 빼내며 제후는 헐렁한 박스티를 벗어 저만큼 내던진다.
아아 말랑한 피부에 제후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흔적이 남는다.
아란은 보이는 곳에는 하지 말라 고 투정을 부려보지만 안 된다 그러면 더 하고 싶어지고 아프다 그러면 더 아프게 만들고 싶은 게 남자의 마음인지라 제후 는 짓궂은 터치의 강도를 높이고 만다.
아파요아프다니까요 하나로 뒤엉킨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꽃잎. 질척하게 고여 흐르는 꿀과 문을 열어 붕붕 날개 짓 하는 벌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꽃 잎. 제후는 침입의 순간을 늦추며 힘겨운 목소리로 말한다.
아프라고 이러는 거야. 네 마음으로도 네 몸으로도 나만나만 기억하라고 이 욕심꾸러기 하아학, 자지러지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아란은 가슴을 희롱하는 제후의 머리를 끌어다 안는다.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그는 그녀의 애원을 듣고도 오랫동안 괴롭히다가 안타까움을 달래준다.
천지의 요동, 격해지는 몸짓. 소용돌이치는 어둠과 귓속을 왱왱대는 바람소리가 넋을 빼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숨소리 할짝이는 침묵. 좋았어? 오랜만이었다.
긴 정사 후에 나란히 앉아 그가 피우는 담배 냄새를 맡는 것도. 응. 아란은 옷을 입지 않은 몸을 담요로 돌돌 말아 가리고 앉아 머리를 제후의 어깨에 기대본 다.
땀에 젖은 샴푸 향기가 알싸하게 스친다.
아무래도 샤워 또 해야겠다.
그치? 응. 제후가 고개를 낮춰 아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내가 먼저 하고 나올까, 같이 들어갈까? 아이 하나 낳으면 그 때 셋이 같이 들어가요. 제후가 피식 웃더니 담요 아래서 오르락내리락 규칙적인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아란의 가슴 을 슬밋, 내려다 본다.
애는 무슨. 무슨 일이 있어도 5년 동안엔 둘이서만 살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허락하시겠어요? 아란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제후는 귀엽게 인상을 찡그리고 아란은 눈을 마주 치다가 다시 풋, 웃어버린다.
아~, 맞다! 그 노친네들을 깜박했네. 대뜸 나오는 말이 퉁명스럽다.
결혼을 하고 철이 들었다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속에 있는 소리를 다 해버리는 제후다.
전화 할 때 마다 손자 얘기를 빼놓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주책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된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거기다 우리 나이는 얼마나 됐다고 애새끼 타령이야. 제후는 아 란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다른 팔은 세운 무릎에 대고 턱을 괴었다.
우리 할아버지이긴 하지만 솔직히 너무 하신다는 생각 안 드냐? 낳으면 키워줄 것도 아니 면서 웬 닦달인지 몰라. 미녀를 안겨줬으면 즐길 시간은 충분히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미녀요? 이제 막 여자 맛을 들인 사춘기의 동궁마마라도 되는 듯한 제후의 말에 아란의 양 볼에는 볼우물이 팬다.
야야, 모르는 척 하지 마. 여기에 너 말고 여자 또 있어? 지금 아부하는 거죠? 아란의 눈흘김에 제후는 한 쪽 눈을 찡긋, 미소어린 윙크를 보내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 닥으로 눕혔다.
어.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아란과 본가를 찾은 제후는 하루를 보내고 할아버지의 명령을 받았다.
여름휴가 겸 영국 바 이어들과의 협상을 포함, 총 4박 5일간의 공식 일정에 동행하라는 것이었다.
장소는 아란과 제후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양가 상견례를 했던 호텔이었다.
내년이면 졸업반이 되는 제후가 대학 졸업하고 계열사 중 할아버지가 친히 일선에 니선 대 원 전자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부사장이 되어 본격적인 오너의 길을 걷게 될 시험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후 6시 이전까진 내 시간 가질 생각 하지 말래. 더운 여름 날 훌훌 벗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정장을 껴입고 다니게 생겼다며 아란을 앉혀놓 고 불평을 해대는 제후였다.
젊은 놈, 젊을 때 좀 놀겠다는 데 왜들 그렇게 못 끼워 넣어서 부산을 피우는지 이거야, 원 재벌 집 손자 노릇도 못해 먹을 일이다.
안 그래, 아란아? 그러네요. 아란이 제후의 넋두리에 입을 모아 웃는다.
차라리 어디 유학이나 갔다 온다 그럴까 너 데리고. 유학이요? 제후가 혼잣말로 한 걸 아란이 알아듣고 물었다.
어. 고개를 끄덕인 제후가 목이 말랐던지 컵에 든 망고 주스를 한 입에 가득 비웠다.
외국 나가서 경험도 쌓고 모자란 공부도 한다 그러면 할아버지도 반대하시진 않을 것 같 아서 말야. 아란이 넌 어때? 먼 데 가서 노친네들 안 보이는 데서 살면 우리의 러브 스케줄에 방해도 안 받을 거고 좋을 거 같 지 않냐? 오빠 유학 간다 그러면 오히려 저는 못 가게 하실 거에요. 공부에 방해 된다구요. 그런가? 뭐, 생각해보니 네 옆에 있으면 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건 사실 이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오빠가 본격적으로 일 배우면 나도 익숙해져야 될 거에요. 혼자 지내는 법에 대해 서요. 혼자 지내는 법에 익숙해진다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이 된 제후가 피식 입가를 올려 웃는다.
아란이 왜 웃어요, 물어보려는 찰나 그가 말을 붙였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유감스럽게도 난 그럴 생각 전혀 없는데. 그러더니 뒤로 양 팔을 벌려 짚고 다리를 무릎에 걸어 건들건들 하면서 아란을 쳐다본다.
나 여기 사장 되면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너 내 비서로 들어오게 해달라고 할 거야. 나 말야, 사실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거 꼭 해보고 싶었거든. 미모의 비서와 바람이 나는 사장 역할. 에?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진짜야. 이왕에 바람이 나는 거 와이프하고 났다 그러면 누가 뭐라 그럴 사람도 없을 테 고. 참 기막힌 아이디어네요. 아란이 말했다.
픽, 실소가 샜다.
밤 낮 안 가리고 침대에서, 소파에서 너 혹사시키겠다는 속셈이지. 그보다 7시를 넘어가는 시계를 본 제후가 말했다.
오늘 일정도 끝났는데 저녁 먹고 밑에 있는 클럽에나 가볼까? 친구들하고 가끔 가는 덴데 분위기 괜찮아. 그래요. 제후는 정장 대신 경쾌한 느낌의 하와이언 셔츠에 면바지로 갈아입었고 아란은 하얀 색 원 피스 차림 그대로 그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해물 볶음밥과 샐러드로 저녁을 먹었다.
낮은 도수의 칵테일로 입가심을 한 다음, 일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테이블마다 시원한 맥주가 인기였다.
아란과 제후도 병맥주 몇 병과 가 벼운 안주를 주문해 마시기 시작했다.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CF로 유명한 카프리 맥주를 한 병씩 비우고 아란이 물었다.
할아버지 따라다니는 거 많이 힘들었죠? 그럭저럭. 바이어가 거의 수출 담당 관계자하고만 얘기를 했지만 가끔 나한테 질문이 오 기도 했어. 그래서 내가 아는 한 대답도 해주고 그랬지. 제후는 영어를 잘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진 아예 집에서 원어민 선생님이랑 생활을 했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영어로만 수업이 이루어지는 특수 사립학교를 다녔다.
그 노란 대머리 아저씨가, 생긴 건 방탕한 양아치 같은 놈이 제 나라 말로 좔좔 제품 설 명을 해주니까 놀라더라. 적절한 협상의 방법 같은 현장 대응 지식은 좀 떨어지겠지만 우리 회사 제품 설명이나 경영이론 정 도는 눈 감고도 읊어줄 수 있는데 말야. 오빠를 얕봤었나 봐요. 아마도. 신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지만 그 피조물은 수준이 낮아서 아직 생긴 걸로 그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남들 보기엔 그리 성실해 보이진 않나봐. 잘생긴 게 죄라고 생각해요. 도톰한 입술에 묻은 맥주거품을 살짝 핥으며 아란이 웃었다.
너도 예뻐, 아란아. 다만 의식을 안 하고 살아가니까 그걸 이용할 생각은 안 하니까 모르 는 거지. 오빠 옆에 있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될 만큼은 아니죠. 그런데 난 중독이에요. 사람이 사람한테 미쳐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가르쳐 준 사람 오빠였어요. 이런 내가 부담스 러울까봐 말하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그래요. 아란아. 테이블을 가로지른 제후의 손이 아란의 손을 잡았다.
너도 알다시피 난, 갖고 싶은 건 뭐든 손에 쥘 수 있었던 부유함 속에서 살아왔어. 그래서 행운이란 말에는 둔감해. 당연히 그 이상에 뭐가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지. 제후가 아란의 손을 들어올려 네 번째 손가락에 입맞춤을 했다.
하지만 누가 만약 나한테 행운을 물어온다면 널 만나 사랑한 게 권 제후 인생의 베스트였 다고 대답할 거야. 이렇게, 내 눈과 내 손이 닿는 곳에 네가 있는 건 행운 이상이라고 생각해. 술이 들어갔어도 상당히 낯간지러운 대사를 제후는 쑥스러운 기색도 없이 소화해냈다.
아란 의 숨죽인 시선이 여전히 제후의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내 행복의 무게는 47㎏이야. 왜요? 165㎝의 키에 47㎏의 몸무게, 까만 생머리에 하얀 얼굴을 가진 스무 살의 여자. 그 여자가 내게는 행복이니까. 아란은 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녀가 그의 전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란은 벌써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오빠는 오빠는? 제후가 선글라스 가운데를 밀어 올리며 웃었다.
날 울리는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요. 그 말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것도 이렇게 시끄러운 음악조차 내 귀에서 떠나 버리게 만들어 버리네요. 내가 그랬어? 처음엔 혼자 바라보게 해서, 두 번째는 날 사랑한다고 해서 그 다음엔?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요. 나한테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 해보지 않았거 든요. 나 오빠한텐 항상 미안했어요. 내가 오빠 사랑하지만 나 때문에 오빠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졌으니까 난 나쁜 아이라고 생각했 이런 이런, 난 감동 먹으라고는 했지 울라고는 안 했어. 기어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아란의 옆자리로 간 제후가 그녀를 끌어안아 토닥이며 말 했다.
수경이하고는 헤어진 건 너 때문이 아냐. 그 애 하고는 어차피 결혼까지 갈 인연도 아니 었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 일로 널 괴롭히지 마. 그리고 너 우는 거 보면 내가 얼마나 난처한 줄 알아? 창피해서요? 아란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제후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나 때문에 우는 게 맞는데 달래줄 자신이 없으니까. 그게 미안하고 속상해서. 진짜 나 우는 거 보면 속상해요? 아란이 붉게 젖은 눈을 들어 묻는다.
사랑하잖아. 저 사랑하는 여자가 우는 거 보고 속 멀쩡할 놈이 어디 있어? 제후는 네가 우는 모습이 웃을 때보다 배는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해준다고 해서 아란이 그걸 이용할 만큼 영악한 여자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알았지? 알아들었으면 앞으로 울지 마. 행복해서 우는 건요? 그것만 빼고. 어, 음악 바뀐다.
나가자. 채 눈물도 훔쳐내지 않은 어정쩡한 표정의 아란을, 제후는 손을 잡아 끌어낸다.
그러고 보니 얘기를 하느라 잘 보지 못했는데 클럽 가운데 무대가 있었다.
여여기서 이래도 되요? 허리를 휘어 감는 제후의 팔에 아란이 옆으로 살짝 고개를 빼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듯 이 묻는다.
원래 손님들이 맘 내키면 나와서 춤추는 곳이야. 물론 파트너가 없으면 곤란하지. 입술을 누르는 진한 맥주 냄새. 제후와 아란은 클럽을 배경으로 녹아드는 Brian McKnight의 을 따라 버드키스를 주고받다 가 스텝을 밟아 나갔다.
행복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회의가 끝나가던 참이었다.
권 회장은 비서가 가지고 들어온 전화를 건네받았다.
오우리 새 아가냐? 새 아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 며느리였다.
네. 저 어디 나가려고 하는데 허락 좀 받으려고요. 지금 바쁘세요? 아니다.
그보다 어딜 다녀오려고? 제후와 함께 나가는 거냐? 권 회장은 당신(當身)과 서너 자리 떨어져 앉은 손자를 보며 말소리를 죽였다.
아란에게 전 화가 온 걸 알고도 바꿔주지 않았다고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할 테니. 오빠는 할아버지가 데리고 계셔서 안 되잖아요. 저, 오늘 재영이 보러 갈 건데 괜찮을까 해서요. 어리광을 부리는 손녀 같은 말투에 노인의 주름진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네 뜻대로 하려무나. 동생 보러 간다는데 누가 뭐란다고. 아니, 참 이리로 데리고 오는 건 어떻겠니? 마침 오늘 저녁에 호텔에서 파티가 있는데 사돈어른도 참석하실 거다.
그럴게요, 그럼.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다시 비서에게 건넨 권 회장은 5분 후, 모두들 수고했다는 말로 예정 보다 일찍 회의를 끝냈다.
제후야. 왜요, 할아버지? 회의장을 나서며 핸드폰을 꺼내던 제후가 뒤돌아보았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려던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 며칠 숨통을 죄어놨으니 한 번쯤 고삐를 풀어줘도 괜찮겠지. 내 심부름 좀 다녀오련? 심부름요? 그런 건 박 기사 아저씨나 할아버지 비서들 시키면 되잖아요. 빨리 전화를 걸어 아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데 왜 꼬리를 잡냐는 듯, 귀찮은 표정이 역력 했다.
어린 손자를 놀리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빙그레 미소가 올라왔다.
누가 외출을 하려는데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하다는 구나. 아, 그러니까 그 누구가 누구냐고요! 심통까지 부린다.
바이어와 얘기를 할 때는 할아버지를 닮아 더없이 냉철한 사업가가 되었 다가도 아란이 끼면 금세 팔불출 남편이 되어버리는 손자였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네 오후 스케줄은 취소됐으니 그렇게 알고 그 사 람과 있다가 시간 맞춰 들어 오거라. 등 뒤로 비서를 비롯한 회사 간부들을 거느리고 복도를 걷던 권 회장의 자애로운 웃음소리 가 복도에 울렸다.
들은 척 만 척, 핸드폰을 들고 단축번호를 누르려던 제후의 손이 멈칫한다.
혹시? 의문에 답하듯 권 회장 대신 제후를 돌아본 비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한다.
제후의 입가가 양 옆으로 길게 벌어졌다.
할아버지, 이따 저녁 때 뵐게요! 어느새 권 회장을 앞질러 달려가며 제후가 소리쳤다.
올라오려면 2층도 남지 않은 엘리베이 터를 못 기다리고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란아! 아란아! 우당탕탕, 노크도 없이 뛰어 들어오는 남자의 출현에 욕실에서 수건 하나만 달랑 걸치고 나 오던 아란이 깜짝 놀랐다.
뭐뭐에요, 누구신데어? 오빠? 있잖아 너, 아니다.
문부터 닫고 얘기하자. 제후가 뒤로 발을 뻗어 차듯이 문을 닫고, 아란의 손을 잡아다 침대에 앉힌다.
그리고 땀이 흐르는 이마를 쓱 닦는다.
너 혹시 할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나 좀 보내달라고 그랬냐? 아뇨. 재영이 보러 갈 건데 나갔다 와도 되냐고 허락만 받았는데. 뭐야, 그럼! 내가 배달을 잘못 왔다는 거잖아? 배달이요? 할아버지가 오늘 오후 스케줄 다 취소하고 너랑 시간 보내도 된다고 하시길래 난 또 네가 주문 배달시킨 줄 알았단 말야. 제후가 거추장스런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던졌다.
뭐야, 괜히 좋아라 뛰어왔네. 누구는 생각도 없는데. 그리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아란을 쳐다본다.
아란이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아직 앉을 생각이 없는 제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화났어요? 화났다, 어쩔래? 숨기지 않은 퉁명스러움이 귀여워 아란은 웃음이 나왔다.
난 이만큼 보고 싶었는데 넌 왜 나만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냐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보다 네 살이나 많은 남자가. 제후가 말했다.
웃음이 나온다 그거지. 그래, 하나밖에 없는 남편 정신없이 뛰어오게 만든 게 그렇게 웃 겨? 그럼 오빠 봐서 좋은데 웃지, 울어요? 아란이 제후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급작스레 균형을 잃은 제후의 몸이 기울어지고 그의 무게에 눌린 그녀도 따라서 침대로 넘어졌다.
젖은 머리칼에서 나는 플로랄 향기가 제후의 숨 속으로 흘러들었다.
귓불을 스치는 숨결이, 펄떡이는 심장이 그의 몸 밑에서 존재를 알렸다.
야, 너! 쉿 아란은 입만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제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토라진 아이를 달래려는 듯 눈빛은 부드러워졌다.
자기가 생각해도 대담한 행동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란이 말했다.
나 오빠 많이 보고 싶었다고요. 혼자 쇼핑하면서, 밥 먹으면서 영화 보면서 오빠 생각만 하고 오빠만 보고 싶어 했다고요. 그걸 로는 부족해요? 아직도 내 마음 몰라요? 비로소 그의 얼굴에 녹아드는 미소. 아란의 입술에 제후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렇게 아란은 윤곽을 따라 제후의 눈과 코와 입술을 순서대로 만져가며 말을 붙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늘 옆에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오빠라구요. 그래도 날, 모르 겠어요? 그래. 널 처음 봤을 땐 몰랐었어. 알았더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널 상처 주지 않았겠지. 다가서는 네 눈 외면하고 혼자 울게 내어버려두는 일도 없었겠지. 옛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제후였다.
알아. 아란의 입술에 다시 제후의 입술이 닿았다.
그런데 알아도 알아도 모르겠어. 가져도 가져도 부족함만 느껴지고 더 많이 갖고 싶어 욕 심이 나. 내 눈에 안 보이면 화가 나고 다른 사람이 보고만 있어도 빼앗기는 것 같고 널 내게 묶어 놓을 뭔가를 찾게 되고 날 떠나지 못할 구실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리고 나, 한심하지? 제후가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도 항상 손해 본다고 생각했던 마음. 내가 먼저였고 내 사랑이 더 크고 내 사랑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사람이라 믿었던 짧은 생각. 그 오해와 편견을 오늘 버려야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아요. 아란은 제후의 쑥스러운 웃음에서 그녀보다 큰 사랑을,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한심하긴요. 그렇게 치면 내가 오히려 더 바보고 한심하죠. 집착하니까. 사랑이 아니고 집 착이 되어 떠나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오빠만 보게 되니까. 미안해하지마요. 나한테 미안해하지마요. 그래서 날 미워한다고 해도 난 오빠만 보고 있을 거니까 말간 눈에 눈물이 고인다.
행복해서 우는 건 허락하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란을 나무랄 수 없는 제후였다.
내가 왜아니, 어떻게 널 미워해. 결혼은 평생 독점하는 건데. 집착이라고 해도, 한심해 보여도 우리한테는 그게 사랑이고 행복인건데 널 어떻게 싫어하고 미워해.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랑이 있었구나. 서로를 바라보면 하늘 가리는 검은 구름처럼 영영 그 푸른 빛 보지 못할까 조마조마 가슴에 손 올리고 잠 못 이루던 사랑이 있었구나.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아픔, 그러나 이내 행복 한 조각이 되어 서늘한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그녀를 제후는 힘주 어 품었다.
제후의 생각처럼 재영은 유치원 앞에서 누나와 만난 순간부터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업가인 장인은 어린 아들을 돌봐줄 시간이 없어 보였고 대원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제 후 역시 할아버지의 소개를 받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아란과 붙어 있을 시간이 없으면서도, 아들이나 되는 것처럼 아 란에게 꼭 붙어 있는 어린 처남이 못마땅했다.
한 가지 더. 술잔을 들고 기울이면서 제후는 오늘따라 불안한 눈으로 아란을 쳐다보고 있었 다.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얄궂게도, 파티를 위한 선물이라며 할아버지가 건네셨던 상자 속에 들었던 드레스는 검은 색에, 등이 다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잘록한 허리가 강조되며 다리가 돋보이는 섹시하고 성숙한 느낌도 보태졌다.
어딜 봐도 남 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그녀였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잠시 손님들로부터 멀어진 틈을 타 제후가 물었다.
무얼 말이냐? 시치미 떼지 마세요. 아란이 옷 할아버지가 장난치신 거죠? 제가 어쩌나 보려고. 허허, 녀석. 어지간히 안달이 났구나. 왜, 아란이가 너 두고 바람이라도 필까 봐 걱정 되 냐? 할아버지! 제후가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권 회장은 손자를 놀리는 게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건 내가 보장하마. 너처럼 무서운 남편을 두고 어찌 딴 짓 을 할까? 권 회장은 붉은 빛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때마침 다가온 H은행의 은행장과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또 다른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병 주고 약 주고였다.
그래도 어찌 됐든 간신히 혼자 남았다.
자연히 제후의 걸음은 아란을 향해 갔다.
어, 아저씨다! 아란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려 있던 재영이 쌔액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후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 누구더러 아저씨래? 제후는 재영을 번쩍 공중으로 안아 올리며 아이를 을렀다.
화가 난 척 했지만 마주 보는 두 남자의 눈 속엔 똑같은 장난기와 웃음이 어려 있었다.
병원에서 친해진 덕분이었다.
누나보다는 못하겠지만 재영은 매형을 좋아하고 따랐다.
아저씨 왜 인제 왔어. 누나가 많이 심심해하잖아. 형네 할아버지가 딴 데 가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랬지. 할아버지 무서워? 난 할아버지 좋은데. 재영이 제후의 어깨 너머로 권 회장을 보며 말했다.
형도 좋아해. 근데 할아버지도 무서울 땐 무서워. 나 할아버지한테 가보고 싶어. 그러면 안 돼? 안 될 거야 없지. 형이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한 번 가 봐. 목을 감았던 팔을 풀어 내려놓자 재영이 쪼르르 권 회장에게 달려갔다.
까만 연미복을 입고 조그만 발로 뛰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깜찍 그 자체였다.
이 담에 우리 아들, 딱 저만큼만 예뻤으면 좋겠다.
할아버지가 재영을 안아 어르는 모습을 보며 제후가 말했다.
어렸을 때 그의 모습 같기도 했고 미래의 아들 같기도 한 꼬마였다.
누구의 완벽한 유전자를 타고 난다면 그러겠죠. 누구보다 더 장난꾸러기에 욕심꾸러기에 말은 지독하게 안 듣는 말썽꾸러기. 아란이 술잔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너 닮으면 괜찮고? 사내자식이 기집애마냥 질질 짜는 모습보다는 차라리 아빠 닮아서 말 썽피우고 싸움대장 되는 게 낫지. 오빠 싸움 잘해요? 애들한테 얻어 터져서 울고 들어왔던 기억은 한 번도 없으니까. 특히나 아버지 어머니 돌 아가시고 난 다음부터는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중학교 고등학교 땐 일부러 싸움질 배우고 다녔어. 제후가 비스듬히 벽에 기대며 웃었다.
지금은 싸울 일이 없어서 주먹을 아끼는 거야. 생각해 봐. 좋든 싫든 장래, 그룹의 총수가 될 사람이 허랑 방탕도 모자라 조폭 노릇까지 하고 다녔다고 그러면 대외적인 기업 이미지도 안 좋아질 거고 그냥 본인 이 알아서 몸조심 하는 거지. 해보고는 싶어요? 뭐, 기회가 주어진다면.제후는 아란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넌 그러면 보스의 정부가 되나? 아란이 어깨를 으쓱, 웃었다.
그러네요. 술과 웃음, 하룻밤의 약속을 담은 눈길이 오가는 파티였다.
특별한 목적 없이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였으나 재계의 큰 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궁전으로 인도할 마법의 양탄자처럼, 술잔을 탄 이브닝드레스의 여자들은 꽃잎처 럼 너울거렸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눈길도 자연스러웠다.
앞으로는 할아버지가 파티 앞두고 뭐 선물하신다고 그러면 받지 마. 왜요? 알면서 당해줄 필요 없잖아. 넌 유부녀라고. 타고난 게 죄라면 오빠는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요? 아란이 한 술 더 뜬다.
싫지만은 않은 빈정거림에 제후가 피식 웃었다.
알아주니 고맙긴 한데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남들 눈에 폐가 될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 어. 그보다, 너나 조심하지 그래? 내가 뭘요? 생긴 걸로 치면 은 아란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야. 만약에 권 제후라는 주인이 생기지 않 았다면, 그래서 한 사람에게 묶어두지 않았다면 숱한 남정네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때론 사지로 몰아넣었을 거 아냐? 아란이 따라 웃었다.
난 남자들을 데리고 놀 만큼 영악한 머리는 못 되요. 뭐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도는 해보 겠지만. 부디 시도만으로 끝나길 바래. 맘 약한 서방님 울릴 생각이 아니라면. 아란이 너스레를 떠는 제후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며 눈을 흘겼다.
그들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권 회장은 살아생전의 아들과 며느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다정한 모습의 손자와 손자며느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 파티는 끝이 났다.
제후는 다시 할아버지를 따라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손님들 을 배웅하러 나갔고 아란도 아버지와 동생을 보내고 들어왔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서 쉴까 하다가 아직 치우지 않은 샴페인 잔 하나를 들고 홀 뒤에 있는 발코니로 나갔다.
바람이 시원했다.
하루 종일 쉴 틈 없었던 몸은 피곤했다.
낮에는 시간보다 일찍 돌아온 제후와 놀아주느라, 저녁에는 제후의 말마따나 자식처럼 엉겨 붙는 재영을 데리고 있느라 말이다.
또래 애들이 다 그렇지만 엄마의 보살핌을 떠난 동생은 유난히 어리광이 늘었다.
늘 일에 치여 사는 아빠도 조금은 야위신 것 같아 아란은 신경이 쓰였다.
아빠와 사이가 좋은 것으로 참고 살아왔던 새 엄마의 부재가 오늘따라 아쉬웠던 것도 사실 이었지만 그 자리에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생각하면 원망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었다.
옛날 같으면 나만 참으면 모두 행복하다는 식의 논리에 몸을 맡겼을지 몰라도 아란은 달라 져 있었다.
제후도 남을 위해 희생 하는 건 평판이야 좋아질지 몰라도 결국 자기만 손해 보는 짓이라고 했었다.
가끔은 나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아보라고 말했다.
이기적으로. 아란아. 문득 등 뒤에 인기척이 났다.
아란이 고개를 틀었다.
아란아.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아란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정리가 덜 끝난 홀에서 내비 치는 불빛에 이목구비가 드러나는 큰 키의 남자 한서오빠? 그래, 나야. 반가움, 그리고 놀라움. 한서를 보는 아란의 표정은 그랬다.
우리 되게 오랜만이다 그렇지? 3년 10개월 만이니까 무려라는 말을 해도 상관없을 거야. 꼬마 공주님. 꼬마 공주님이라니!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게다가 결혼도 했고 말이지. 놀리는 듯한 한서의 말에 아란이 대들었고 잔뜩 찌푸린 인상의 제후가 불쑥 끼어들었다.
한 서가 뒤돌아섰고 제후는 아란과 함께 서 있는, 처음 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걸음을 멈췄다.
아란이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 매제. 매제(妹弟)?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제후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아란이한테 오빠가 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는데. 그럴 만도 하지. 난 버려진 자식이거든. 알 수 없는 말을 해놓고 한서는 아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난 밖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볼게. 나에 대해서 매제한테는 네가 잘 얘기해줘. 그리 고 언제 만나서 식사나 하자. 응. 잘 가, 오빠. 사라지는 그에게 아란은 웃는 얼굴로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한서의 뒷모습을 쫓던 제후의 눈이 아란에게 돌아왔다.
그리 곱지만은 않은 눈빛. 꺼리는 빛이 역력한 눈동자였다.
나도 먼저 들어간다.
오빠, 저 사람은 됐어. 제후는 입술을 씰룩, 하고 돌아서서 홀을 나와 버렸다.
그 남자의 얘기를 아란에게 듣는다면 어쩐지 http://agora.shenala.com 변명을 듣게 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매제라고 했으니 남은 아니겠지만 조금도 지지 않고 마주 쳐다보던 한서의 눈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앞선 생각일지는 몰라도아란을 보던 그 눈은 여동생을 보는 오빠의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녀석, 대체 뭐야? 새벽 2시. 침대에 누워도 한 시간은 뒤척이다 잠이 드는 게 습관이라고 해도 오늘은 시계 침 소리를 따라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한서였다.
두 손을 깍지 끼어 머리에 베고 천장을 바라보는 한서의 눈은 공중에 아란의 영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아는 세일러 교복의 여학생은 이제 수 년 전의 과거에 묻혀버렸지만 산뜻한 화장에 이 브닝드레스를 입은 아란은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성숙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권 제후.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사업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스물네 살의 풋내기. 그녀의 남편이라고 했다.
제멋대로에 건방짐의 표상처럼 보이는 그 녀석이, 아란과 어울려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낸 그가 현재 은 아란의 주인이라고 했다.
IMF보다 힘들다는 경제적 고비에도 끄덕 않는 튼실한 계열사들을 거느린 대원 그룹의 총수 권 중현 회장이 그의 할아버지이며 든든한 후원자였다.
권 제후는 바로, 그 대원 그룹의 후계자라는 절대적인 타이틀에 경제적인 부유함과 외모, 두 뇌까지 갖춘 남자였다.
아란은 행복해 보였다.
불행과 무관심이 이혼으로 이어지는 정략결혼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남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파티 내내 가까이서 맴 돌던 한서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 라고 누구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이미 너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아란은 한서를 첫 눈에 알아보고 반가워했지만 그 뿐이었다.
오래 전 알고 지냈던 사람에 대해 기억이 일으킨 반응일 뿐이었다.
한서의 눈에 그녀는 혹시나 남편이라는 녀석이 보고 둘의 만남을 오해할까봐 걱정하는 것처 럼 비쳐졌다.
말하자면 지금의 사랑에 방해가 될까봐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거였다.
언제나 과거의 연인은 그런 법이었다.
결코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고 그저 한 때의 추억 으로 잊혀져야 하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데 왜 난 그렇지 않은 걸까. 왜 나에게 은 아란이라는 여자는 과거의 그림자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렇게 현실이 되어 내 가슴을 두드리는 걸까. 그것도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를.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 옆에 있는 장식장으로 걸어간 한서는 수많은 갈색의 병들 중에 서 하나를 꺼내고 잔을 채웠다.
그리고 깊은 밤을 흐르는 한숨과 함께 그것을 입 안으로 비워 넣었다.
그렇다니까. 얘기도 안 들으려고 해. 아란은 턱과 뺨 사이에 전화기를 끼워 넣고 말을 이었다.
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입 다문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니? 선배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지. 미진은 뜻밖에도 제후의 편을 들었다.
그냥 사귀는 것도 아니고 너흰 부부잖아. 이제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내의 오빠라고 했을 때 남편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 아마 배신감 느끼고도 남았을 걸. 하지만 한서 오빠는 이제 친오빠와 다름없는 사람이다? 이 바보야, 설사 그 사람하고 네가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였 다고 해도 정말은 새 엄마의 아들이었잖아. 알아들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남! 미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윤 한선가 하는 사람하고 보통 사이도 아니었잖아. 미진아. 그냥 오빠 동생이었다고 해. 오해 살만한 행동 안 하게 조심하고. 하여튼 어떤 일이 있어 도 한서오빠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말 제후 선배 앞에선 꺼내지 마. 알았지? 바보가 아닌 이상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알았어. 다음에 통화하자. 아란은 전화를 끊고 침실로 들어갔다.
넓은 퀸 사이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11시가 다 되가는 시간이었지만 제후는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요전번, 바이어와의 계 약일정에 동참했던 것이 흥미의 계기가 되었는지 아르바이트도 삼아 할아버지의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일 때문이라고 했지만 아란은 제후가 시위 중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 번의 마주침에도 금방 이름이 떠오를 만큼 친했던 사람, 남편이 보는 앞에서 손까지 흔 들어 주며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그 남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그래서 그를 기분 나쁘게 한 미지의 남자를 비밀로 남겨두 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윤 한서. 그 남자 한서는 새 엄마 나현의 아들이었다.
아란의 아버지 은 사장과 재혼하면서 그녀가 데리고 들어왔던 전 남편의 아들이었다.
조용한 성격에 큰 탈 없이 새 가족들을 받아들인 의붓 여동생 아란에 비해 반항도 하고 어 른들 눈에 거슬리는 짓도 많이 하던 소위 문제아였다.
새 집, 새 식구에 적응을 하느라 저러는 것이려니 몇 년간 내버려두었던 아버지와 새 엄마 를 대신해 아란은 의붓오빠를 나무랐다.
우리와 함께 사는 게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이 집을 나가서 혼자 살라고. 남남이라도 서로 에게 상처주고 못된 사람으로 기억 될 일은 하지 말라고. 놀랍게도 아란이 정면으로 부딪친 그 날 이후부터 한서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럭 저럭 집안 분위기에 맞춰나갔다.
비슷한 외로움과 고민에 처해있던 아란과 한서가 친해진 것도 그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병상련의 정인가 했지만 감정은 참으로 모를 일이어서 어느새 이성간의 호감으로 바뀌었고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것이 되어버렸다.
아란의 나이 열일곱, 한서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비록 육체적인 관계는 오가지 않았으나 두 사람에게 서로는 첫사랑이었고 드러내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럽고 열렬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아들과 의붓딸의 관계를 알아차린 나현은 아무리 남매라지만 사춘기의 여고생과 한 참 여자에 관심을 기울일 청년을 한 집에서 지내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새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한서가 성을 따른 친부(親父)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고 그로부터 한서 와 아란은 얼굴을 보지 못한 채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은 남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형제도 친척도 아닌 애매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첫사랑을 다시 만났다고 해서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가 제후를 만나고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아란은 한서와의 사랑이 남긴 아픔을 잊어갔다.
제후와 진정으로 행복했기에 며칠 전 우연히 파티에서 한서를 보았을 때도 그저 친한 오빠를 만난 것과 같은 편안함으로 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예전 한서와의 관계를 제후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앞으로 한 서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거였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니 제후 성격에 당장 이혼하자는 말 안 나오리란 법 없고 그렇다고 미진 의 말대로 했다가 나중에 한서가 뒤집어 버리면 어쩌나 이래저래 고민이었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지금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다말고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갑자기 눈앞이 훤해져서 깜박거리는데 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잠과 고민 속에서 헤매던 아란이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오는 거에요? 어. 모자에 눌린 머리를 흔들며 제후가 말했다.
더우면 주스 한 잔 가져다 줘요? 그러던지. 등을 보이고 티셔츠를 벗는 제후를 쳐다보다 아란은 침대에서 발을 내려 주방으로 갔다.
그 녀를 보는 표정도 그렇고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나 보다.
대체 언제까지 저럴 생각인지, 아란도 속이 답답했다.
주스를 따르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 내려다가 냉장실 문에 채워 둔 맥주 캔에 눈이 갔다.
너 그거 뭐야? 더워서 한 잔 하려고요. 얼음을 넣은 오렌지 주스를 제후에게 건네고 아란은 보란 듯이 캔 뚜껑을 따고 맥주를 마셨 다.
CF모델처럼 벌컥벌컥 맛난 소리까지 내면서. 뭐에요, 남 술 마시는 거 처음 봐요? 한 마디 쏘아준 다음 두 번째 캔에 손을 댔다.
제후가 벙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아란의 앞에는 빈 캔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만 마셔. 남편 앞에서 술주정 할 일 있냐? 마침내 여섯 번째 캔을 잡으려고 했을 때 제후가 막았다.
보기 싫으면 밖에 나가서 마실게요. 뿌리치는 손을 제후가 다시 잡았다.
너 지금 나한테 시위 하냐? 며칠 늦게 들어왔다고? 어떻게 알아요? 회사에 나가서 일 한다 그러고 여자들이랑 바람피우는지. 입술을 삐죽, 하고 토라진다.
이럴 때 보면 아란도 영락없는 스무 살 여자애였다.
제후가 피 식, 웃고는 침대로 드러눕는다.
맘대로 생각해. 등을 보이고 누운 제후를 원망스레 쳐다보던 아란은 빈 잔과 캔들을 모아 가지고 침실을 나 간다.
불을 꺼주고 나가길래 곧 있으면 들어오겠거니 했는데 한참이나 기척이 없다.
줄다리기를 하다 지친 제후가 결국은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아란아. 야, 너 라고만 부르다가 며칠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거실 소파에 무릎을 세워서 모아 앉은 아란이 힐긋 제후를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다.
오빠라는 사람 일도 그렇고, 이번엔 좀 강하게 나가볼까 했는데 그 모습에 그만 속이 쓰리 다.
쓴 웃음을 지으면서 제후는 아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안 자? 술 깨면 들어갈 거니까 오빠 먼저 자요. 나 너 없이 잠 못 자는 거 알잖아. 난 오빠 없이도 잘 자요. 그저께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어요. 아란의 눈동자는 정면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여기서 혼자 자든지. 난 피곤해서 말릴 기운도 없다.
더 이상 관심 없는 척 일어나는 제후를 아란이 뒤에서 안았다.
허리를 안은 팔을 떼어 내려 하자 가만히 힘이 들어갔다.
왜? 나 먼저 자라면서?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제후의 물음은 시큰둥했다.
아직도 화났어요? 네가 언제 잘못한 거나 있었냐? 난 기억에 없는데. 그러지 마요, 제발. 그래서 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제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뻣뻣이 세웠다.
미안해요. 오빠가 화내는 게 무엇 때문이든, 난 오빠가 화내는 모습 보고 있으면 아파요. 오빠 마음 밖으로 벗어난다는 게 무섭고 두려워요 아란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먹임이 되어 있었다.
제후는 아란의 팔을 풀고 돌아서서 그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너 속상하게 만든 건 나도 미안해. 하지만 앞으로는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응. 그럴 거에요. 제후는 비로소 웃음이 배는 아란의 뺨을 쓸어보다가 촉촉한 감촉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가 져가 눌렀다.
맥주 냄새가 살짝 났지만 싫지는 않았다.
우리 화해한 기념으로 오랜만에 밤 운동이나 할까? 술도 깰 겸. 아란은 두 팔을 제후의 목에 걸어 화답했다.
한서야.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20대 여자 못지않게 잘 가꾼 몸매며 그 몸에 어울리는 우아한 정장과 헤어스타일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셨어요. 한서는 어머니의 자리를 빼주고 앉기를 기다렸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웨이터가 다가오 자 두 사람은 각각 헤이즐넛과 모카커피를 주문했다.
재영이도 떼어놓고 혼자 사신다면서 외롭지 않으세요? 너도 소식을 들은 게구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나현이 말했다.
한서가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본다.
50이 다 된 그녀에 게선 이혼을 하고 생활고를 걱정하는 여자들의 근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새 아버지하고는그러니까 은 사장님하고는 어떻게 헤어지신 거에요? 그 아이 때문이지. 나현은 잔을 휘젓던 티스푼을 꺼내 잔 받침 옆에 놓았다.
뭐라고 지 아버지한테 속살거렸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이 이혼 서류를 들고 왔더구나. 먹고 살 만큼은 보태줄 테니 더 이상 내 딸을 괴롭히지 말라면서. 한서는 한숨을 쉬었다.
10년이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면서 아란이 얼마나 입을 조심히 다루 는지 알고 있는 그였다.
아란에 대한 일방적인 미움에 대해서도. 진실이 드러난 거죠. 뭐라고? 만약 어머니 말씀대로 아란이가 입이 가벼운 애였다면 어머니는 위자료는커녕 찬 겨울에 무일푼으로 쫓겨났어도 할 말이 없어요. 그 애가 착하니까 참고 살아준 거지. 솔직히 이유도 없이 아란이 미워하셨던 게 사 실이잖아요. 은 사장님과도 돈 때문에 결혼하셨던 거구요. 제 말이 틀려요? 하한서야, 너!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열기가 확 올라왔다.
그리고 아란이와 제가 좋아하는 거 알고 저 아버지한테 보내신 거구요. 먼 산 보듯 창 밖으로 시선을 놓았던 한서가 다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너너 무슨 말을 그렇게 돌보기 귀찮은 의붓딸과 짝을 맺어주기에는 이 아들이 아깝던가요? 그래서 스무 살이 되 자마자 생판 모르는 남자와 결혼시켜서 쫓아내셨어요? 사모님 소리 듣고 재벌가의 사람이 되었어도 남들 보기에는 결국 어머니와 난 굴러온 돌에 불과하니까 박힌 돌 내치고 기반 잡으면 부르려고 전 아버지한테 보내셨구요? 어미한테 말이 너무 심하구나! 어머니의 나무람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커피잔을 쥐는 한서의 입가에 시니컬한 웃음이 맴 돌았다.
한서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목적이셨든 좋아요. 다만 아란이와 절 그 때 떼어놓지 않으셔야 했어요. 그랬다 면 전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자를 넘보는 그런 나쁜 놈은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 커피를 마시던 나현의 손길이 조금 늦추어졌다.
그랬으면 새 아버지와 어머니 눈에 띄지 않는 먼 외국으로 나가서 살 수도 있었을 거에 요. 두 분 명예에 흠 가는 일 없이 둘이서 잘 살 수 있었을 거에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냉정을 되찾은 나현이 아들을 보며 말했다.
한서 네가 뭐라고 해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아이 보기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더구나. 너 같은 건 깨끗하게 잊고 말이야. 문득 권 회장의 생일에 청담동 집을 찾았던 일이 떠오르자 나현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힘들게 재혼하셨는데 오죽 하시겠어요? 아란을 감싸고돌던 제후의 표정과 말투는 은 사장과 헤어진 지금에 와서도 영 눈에 거슬리 고 화가 나는 그녀였다.
사위로서, 사돈댁에 어려운 걸음 한 장모에 대한 예의도 차리지 않았던 건 물론이거니와, 보 통의 손님 대접도 하지 않던 불쾌한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할아버지의 나무람에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라며 싸늘히 노려보던 눈빛. 그리고 섬뜩하 도록 입가에 걸렸던 조롱기. 제후가 아란의 손을 끌고 사라지고, 우리 아이의 무례함을 용서해달라던 권 회장 내외의 사 과를 받긴 했지만 이미 오물은 뒤집어 쓴 후였다.
그건 확인해 봐야 알 일이죠. 그래서 말인데 어머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요. 부탁이라니? 한서의 늦은 대답에 나현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 때 일에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갖고 계신다면 반드시 도와주셔야 되요. 설마 너 나현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바르르 떨렸다.
예, 맞아요. 저 아란이 다시 찾을 거에요. 한서가 다시 웃었다.
아줌마, 나 피곤해서 좀 쉴 테니까 누구 전화 오면 외출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다고 해 요. 아들과 헤어져 혼자 사는 빌라로 돌아온 나현은 집안일을 봐주는 여자에게 얘기를 해 둔 다 음 화장도 지우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 녀석 찾아가서 말씀해주세요. 아란이하고 제가 어떤 사이였는지. 딸이라고는 하지만 두 번째 이혼을 하고 아예 관심 밖에 있는 아이였다.
한서의 말마따나 잘 해준 것도 없고, 그래서 받을 것도 없는 남이 된 아이였다.
똑같은 환경에 놓인 한서와는 다르게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엄마라고 부르던 아이. 남편이 없으면 괜한 트집을 잡아 나무라도 피하지 않고 큰 눈을 마주하다가 일말의 대꾸도 없이 돌아서버려 무서움마저 들게 만들던 아이 같지 않았던 아이. 친엄마를 닮아 너무 예쁘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생명 없는 인형처럼 죽은 눈동자를 하 고 있던 아이. 그런 아란을 사람답게 만들었던 건 뜻밖에도 나현, 그녀의 아들인 한서였다.
새 엄마에 대해 선 입을 다물던 소녀가 겁도 없이 다섯 살이나 위인 오빠를 향해 소리를 냈던 것이다.
윤 한서, 그렇게 이 집 공기가 구역질나고 싫으면 아빠한테 돈 달래서 다신 들어오지 말 고 혼자 살아! 괜히 들어와서 식구들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그 때 나현은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아란의 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 생기를 나누어 받은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두 아이는 모두 삶의 이유가 될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2년 뒤, 나현은 적당한 핑계를 대어 한서를 제 친부에게로 돌려보냈고 이제 엄마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버린 아들은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놓으라고. 후 나현은 이마를 가렸던 팔을 떼고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방 안에 있던 작은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고 두통약을 꺼내어 삼켰다.
안 돼, 한서야. 그 애는 안 돼. 마치 아들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현은 읊조리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다.
오후 늦게 걸려온 전화에 아란은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설마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재영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한 때는 그녀가 엄마라고 불렀던 사람. 웬일이세요?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시간 있으면 얼굴 좀 봤으면 좋겠는데. 아란은 은연중에 시계를 봤다.
제후와의 저녁식사 약속이 7시로 잡혀 있었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빠 얘기에요? 만나서 얘기하자. 여기 너희 집 앞 커피숍이다.
나오거라. 전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주저하던 아란은 입고 있던 옷에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집에서 나왔다.
그녀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새 어머니가 그것도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정말로 남이 된 상태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다.
집 앞 커피 숍. 여기다.
찾기도 전에 목소리로 위치를 알린 나현이 보였다.
아란은 예의상 목례를 하고 맞은편에 앉 았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아란아. 단조롭고 고고한 음성에 변화가 있었다.
아까 통화를 하면서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맞았나 보다.
한서가 한서 오빠가 왜요? 불안하다.
저 입에서 반가운 소리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번엔 왠지 더 예감이 안 좋았다.
그 아이가 며칠 전에 날 찾아왔었다.
그러니까 왜요! 초조함에 큰 소리가 나왔다.
나더러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널 다시 찾겠다고, 네 남편을 찾아가 한서와 네가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 말해달라고 부탁하더구나. !! 나현은 심호흡을 하고 한 번에 말을 쏟아내었다.
아란의 안색이 천천히, 하얗게 질려갔다.
안 돼요오빠하고 나 이젠 안 돼요. 엄마도엄마도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 때도 우리 만 나지 못하게 오빠 보내신 거잖아요. 모르겠니? 나 역시 그걸 원하는 건 아니다.
너나, 헤어진 네 아빠에게 굳이 나쁜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지도 않아. 도움을 청하는 듯한 아란의 눈빛을 보면서 나현은 처음으로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모정(母情), 힘들어하는 자식을 돕고 싶어 하는 어미의 모정이었다.
옛날에 너한테 잘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난 내 아들이 잘못되는 것도 그 리고 네가 불행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아. 권 서방보다 널 먼저 찾아온 건 그런 이유다.
짤랑. 나현이 나가면서 커피 숍 문에 걸어놓은 종이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몇 번인가 더 짤랑짤 랑 거렸어도 아란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서가 잘못되는 것도 아란이 불행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던 말은 분명 진심이었는데, 새 어머니가 최초로 보여준 호의는 아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란은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내가 한서 오빠를 만나야 할까? 날 잊어버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라고 말해야 할까? 그것으로 상황이 종결된다면 아란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한서가 끝까지 제후에게 그녀 와의 과거에 대해 입을 다물어 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오빠는 존재를 숨긴 것만으로도 그렇게 화를 냈는데 더 나아가 복잡한 감정이 오가던 사이였다고 하면 제후 오빠는 뭐라고 그럴까? 심지어 한서 오빠가 집에서 쫓기듯 나간 이유가 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면? 그리고 이 모든 얘기들을 내 입이 아닌 한서 오빠의 입에서 듣게 된다면? 안 돼! 아란은 머리를 쥐고 고개를 저었다.
감은 눈 아래로 계속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들만 줄줄이 떠오르고 있었다.
제발제발 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가지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어렵게, 아주 어렵게 찾은 행복을 내게서 가져가겠다는 거야? 이제 내게 그 사람 빼면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아란은 눈물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 이렇게 기도할게요. 아무리 힘든 일이 온다고 해도 저 견딜 테니까 오빠를 제후 오빠를 잃는 일만은 없게 해 주세요. 대원 전자 사옥(舍屋). 그래, 일은 재미있고? 제법 익숙해졌어요. 후아함 아우~ 졸려 죽겠네.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제후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나오는 대로 하품을 했다.
사장과 회 사의 말단 직원이 아닌 할아버지와 손자로 앉아 있는 거라 가능한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은? 애 소식 없냐고 재촉만 안 하시면 생각해 볼게요. 시계를 본 제후가 일어섰다.
저 그만 가볼게요. 아란이하고 밖에서 저녁 먹기로 약속 했거든요. 피곤하면 내일 하루 쉬련? 영광이네요. 사장님께서 아르바이트생 사정까지 다 봐주시고. 뭐 유급 휴가라면 사양은 않 겠습니다.
권 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자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사 장실을 나온 제후는 아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이상하네. 약속한 거 잊어버렸나? 제후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사람이 없는 건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풋잠이라고 잔 게 너무 깊이 잠들어서 전화를 안 받는 건가? 고개를 갸웃갸웃, 엘리베이터로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권 제후씨. 제후가 핸드폰 폴더를 연 채로 고개를 틀었다.
한 남자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180은 넘 음직한 큰 키에 체격이 탄탄한 가만, 저 얼굴을 내가 어디서 봤지? 이제 일 끝난 건가요?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이런, 하나뿐인 매형 얼굴도 잊어버리다니 서운한데? 남자가 하대(下待)로 나왔다.
가까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남자의 얼굴을 제후는 꼼꼼히 살 폈다.
아, 그 파티에서 만났던? 일단 악수를 받아들인 제후였으나 한서를 보는 낯에 반기는 표정은 없었다.
시간이 되면 잠깐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새 엄마 아들이었어요. 우리랑 한 몇 년 같이 살다가 친아버지한테 갔고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거죠. 아란의 말이 생각난 제후가 한서의 청을 받아들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한서가 말을 이 었다.
아란이에 대해서야. 이미 짐작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 애하고 내가 보통 남매 사 이는 아니었다는 거 알고 있지? 제후의 한 쪽 눈가가 찌푸려졌다.
보통 사이가 아니면 뭔데? 연인. 한서는 제후가 충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후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짐작하고 있던 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후의 얼굴에 천천히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거 말고 또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한서도 마주 웃었다.
내가 할 말은 그게 전부야. 네 아내, 그리고 내 과거의 연인인 한 여자를 되찾고 싶으니까 도와달라고. 도와줄 수 없다면? 키가 비슷한 두 남자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한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네 입장에선 당연히 그러겠지. 하지만 너희들 어차피 사랑 없이 시작했잖아. 정략결 혼, 남편과 아내 어느 한 쪽만 마음 바꾸면 가능한 거 아냐? 아니. 한서를 보는 제후의 눈에선 노골적인 적의가 드러났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불가능해. 시작이 안 좋았다고 해도 결과까지 나쁘라는 법은 없잖아? 좋아. 한 걸음 물러난 한서가 말했다.
쉽게 포기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 그래야 싸움을 걸어 온 사람도 재미있지. 어디 한 번 잘해 보자고. 제후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게임이라면 기꺼이 상대해주겠지만 당신에게 승산은 없을 거야. 우리에겐 0%의 빈틈도 없을 테니까. 말해두는데 우리는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야. 부모님이 남들 이목 때문에 억지로 갈라놓 은 거였어. 그래도 신경이 안 쓰이나?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제후가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당신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란이는 변함없이 내 곁에 있을 거야. 그 애가 과거에 누굴 사랑했던지 난 그걸 가지고 아란일 다그치지도 않을 거고 결국, 중요한 건 현재니까. 그래. 중요한 건 현재지. 아란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윤 한서가 아닌 권 제후고, 그 아이가 수많은 여자들을 떠돌던 방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난 조용히 그 아이를 바라볼 거야. 말하자면 당신이 나타났다고 해서 아란이와 나에게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알아 들었어? 제후는 말을 마치고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문 밖에 서 있는 한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고 싶지도 않았다.
천만에. 오만한 웃음. 사내금연(社內禁煙)이라는 스티커를 무시하는 것처럼 한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 터를 보고 있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넌 이미 흔들리고 있어. 아란이는 아니라고 해도 네가 흔들리고 있다고. 알아?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감흥도 없다는 것처럼 한서의 앞을 비켜왔어도 연인이었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제후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세상을 느끼고 있었다.
아란은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니까 이제 제발 화내지 말라고 누구보다 오빠의 마음 밖으로 벗어나는 게 무섭고 두렵다고 울먹였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앞으로는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왜! 제후는 손을 펼쳐 테이블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밀쳐냈다.
술병이, 안주접시와 유리잔이 바 닥으로 떨어지면서 와장창 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왜 또 나를 속인 거냐고. 내 그늘에 숨어 그 녀석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나를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여자처럼 억지로 내 곁을 지키고 있던 거였냐고. 손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것 같은데. 에이프런을 두른 직원이 다가와 엉망이 된 테이블과 바닥을 정리하며 물었다.
제후는 아래로 처박았던 시선을 들었다.
피였다.
자꾸만 검은 색으로 멍울지는 시야 속으로 피범벅이 된 손이 보였다.
눈물이 났다.
아란아 그녀가 보고 싶었다.
전화벨 소리였다.
끈질기게 귀청을 울리는 소리에 아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침대 머리맡을 더듬었다.
새 엄마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 조금 쉬면서 마음을 정리한다는 것이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여보세요? 집에 있었으면서 뭐하느라고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수화기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남자였다.
누누구신데요? 아, 미안. 나 민준이야. 한 민준. 덮어놓고 화를 낸 게 미안했는지 민준의 목소리가 약간 수그러들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선배가 우리 집엔 웬일이에요? 웬일은. 큰 일 났으니까 전화했지. 너 핸드폰도 꺼놓고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란은 그제서야, 아침에 충전기에 꽂아 놓으면서 핸드폰 전원을 껐던 게 생각이 났다.
더불 어 제후와 있었던 7시의 약속도. 약속? 가물가물하던 아란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지금이 대체 몇 시야?! 저기 누구한테 전화가 와서 잠시 나갔다 왔어요. 핸드폰은 아침에 충전한다고 꺼놓고.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이 쪽으로 좀 와라. 나 사는 데, 알지? 제가 거길 왜 가요? 이유 불문하고 와! 니 남편, 권 제후 여기 있단 말이다.
그것도 완전히 술에 곯아서. 그렇잖아도 나현의 건넨 한서의 얘기로 놀라 있던 아란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쿵쿵거리기 시 작했다.
제후가 술을 마시고 민준의 집을 찾아갔다는 소리에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지, 싶었다.
그 게 단순히 저녁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분노는 아닐 거라는 예감도 어렴풋이 들었다.
아이 달래듯 가슴을 손바닥으로 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아란은 찬물로 얼굴만 두드리 고 집을 나왔다.
어서 빨리 제후에게 가야했다.
통화를 끝내고 민준은 침대모서리에 앉아 있는 제후를 보며 물었다.
정말 안 갈 거냐? 안 가. 고집불통이었다.
저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천하의 고집쟁이. 난 공짜 없다.
돈은 걱정 마. 어딜 보고 있는 건지 몰랐다.
텅 빈 눈빛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란이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술에 취해 다쳐서 병원 신세나 지 고. 마음이 다친 건 제후가 쿡, 웃었다.
뭐? 마음이 다친 건 누가 책임져? 제후가 주먹을 쥐자 붕대를 감은 손에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다.
알싸한 담배연기와 허무한 웃음, 가슴을 베인 눈물이 고여 흘렀다.
그 녀석 아니, 참 너도 어렵게 사는구나. 제후는 대답 없이 카펫이 깔린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만 이번엔 뭐가 문제인 거야? 나 말고 어. 민준은 참을성 있게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란이가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 있었대. 그런데? 그 녀석이 나 찾아와서 다시 내 놓으라고 그러더라. 도와달라고 그러면서. 도와 줘? 나 참, 보지는 않았다만 그 놈 참 웃기는 자식이다.
민준이 하, 코웃음을 쳤다.
아란이가 맡겨둔 물건이래냐? 저 싫어 헤어졌으면 그만이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여자 를 왜 다시 찾아? 제후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공중을 쳐다봤다.
멍하니. 두 사람 싫어서 헤어진 거 아니란다.
아란이네 새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그러니까 장모님 친 아들이었는데 둘이 좋아하는 거 보고 어른들이 억지로 이런 씨발! 흥분한 민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넌 그 딴 말 지껄이는 놈을 보고만 있었어? 멱살이라도 잡아서 한 방 날렸어야지! 다신 못 일어나게 흠씬 두들겨줬어야지! 민준아, 만약에 제후가 고개를 틀었다.
억지로 쥐어짠 미소에 민준은 도리어 속이 상했다.
만약에 그 녀석하고 내가 다치면, 그래서 둘 다 죽기 일보직전이라면 아란이는 누구한 테 갈까? 누굴 더 걱정해줄까? 몰라서 물어? 그거야 당연히 그 때 차임벨이 울렸다.
웃는 듯 한숨을 쉰 민준이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제후를 보 며 말했다.
당연히 아란이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지. 문을 열자 몸을 구푸려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해 붉어진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오오빠는요? 가슴에 가득 고인 숨을 내뱉으며 아란이 물었다.
안에 있어. 민준은 느낄 수 있었다.
제후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만약’의 상황이 온다면 아란은 고민할 틈도 없이 제후에게 달려올 것이다.
난 자리 피해줄 테니까 둘이 얘기해. 미안해요, 선배. 괜찮아. 그보다 저 녀석 많이 상심해 있으니까 위로나 해 줘.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 민준을 보고 아란은 비로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에 현관 등 이 켜졌다가 사라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제후를 보았다.
오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토록 흔하게 부르던 오빠라는 말이 갇혀버린 것처럼 목구 멍에서 컥컥거렸다.
오빠. 넌 오란다고 오냐? 그에게 다가가던 눈빛과 걸음이 멈추었다.
여기 남자 혼자 사는 집이야. 만약에 민준이가 딴 맘 품고 너 부른 거였으면 어쩌려고 왔 어? 내 옆으로 오지 말라는 것처럼 쏟아 붓는 나무람에 이 곳에 오는 동안 불안함에 시달렸던 아란은 그 불안함을 배는 가중시키는 제후의 냉담한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와 준 건 고마운데 그냥 가라. 오빠. 혼자 생각할 게 있어. 네가 있으면 걸리적거려. 제후는 침대로 드러눕더니 벽을 보고 시트를 뒤집어썼다.
쳐다보고 얘기하는 것도 싫다는 것처럼, 말 그대로 그녀가 있으면 걸리적거리는 것처럼. 갑자기 왜 그래요? 한참만의 침묵을 깨뜨리고 아란이 말을 했다.
나한테 말할 수 없는 거에요? 화내고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http://kccc.me/naver/839.html 나 잘못한 일 있었어요? 술 마시고 취해서 혼자 친구네 집으로 올 만큼 심각한 문젠데 나하고는 나눌 수 없는 거에요? 그래! 제후는 시트를 젖히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무 화가 나서 네 꼴 보기도 싫으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란 말야! 당장 꺼져! 내던진 쿠션이 아란의 팔에 맞고 나뒹굴었다.
대꾸 없이 똑 떨어지는 눈물이 보였지만 제후 의 폭언은 멈추지 않았다.
더러워. 순결한 척 고고한 척 세상에 다시없는 성녀인 척 가장하고 다가온 그 얼굴이 그 몸이 더럽고 가증스러워. 그러니 내게 오지 마.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다시는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라고!! 눈물 파르르 떨리다 깨물린 입술에서 나는 피. 아마도 알아버린 모양이다.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 나 보다.
알았어요. 아란은 피가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동안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난 멍청해서 말하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지나치도록 차분한 음성이었다.
원하는 게 그거였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어떻게 헤어져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말만 하면 오빠가 원하는 건 언제든 들어줬을 텐데 아란은 돌아섰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을 배짱은 없었다.
갈게요. 울먹임을 참느라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나게 해서 미안하고 그리고 난 자신 없지만 이혼도생각해 볼게요. 구차하지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이 말은 해주어 야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오빠 사랑해요. 오빠만요.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희미한 시야 속으로 환영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반팔 셔츠 아래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제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씩씩대는 민준이 보였 다.
너 이 자식! 대체 뭐하는 짓이야? 아란이 울려서 혼자 보내라고 내가 불러준 줄 알아?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데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기억이 안 나. 제후가 실없는 사람처럼 피식 피식 웃다가 중얼거렸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왜 그 애가 울었는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민준은 주먹에 쥐었던 힘을 풀었다.
제후가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네가 보냈어. 꼴 보기도 싫으니까 여기서 당장 나가라고 했어. 아란이한테 더럽다고 네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내쫓았어. 실상은 밖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그였다.
민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 친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왜 그랬어? 마음에 없는 말이나 하고. 몰라, 나도 모르겠어아란이한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피노키오처럼 거짓말을 해버렸는지. 왜 아란이의 말은 들어보기도 전에 결론을 내려버리고 오해하게 만들었는지. 들어가라. 민준아. 가서 잡으라고! 도망가게 내버려둘 거야? 미안하다고 해서 다른 놈에게 가도록 너 모른 척 할 거야? 나한테 와서 술주정할 만큼 사랑하면서, 그 녀석 때문에 화났으면서도 정작 본인한테는 쪽팔린 꼴 안 보여주겠다 고 밤중에 혼자 사는 친구 찾아와서 넋두리 할 만큼 사랑하면서 보내버릴 거야? 제후의 어깨가 들썩였다.
쿡쿡 웃음소리가 들렸다.
혹시 모르잖아. 그 녀석이 돌아와서 내심 반가워하고 있는지 한심하게 질투하느라 진심 도 몰라주는 서방님한테서 마음이 돌아서버렸는지. 야, 권 제후! 나처럼 밥맛없는 놈이랑 살면서 맨날 우는 것보단 어쩌면 그 녀석한테 가서 행복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잖아 남자의 눈물 일생에 세 번만 보인다는 남자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할 때. 그리고 권 제후는 여자 때문에, 사랑 때문에 한 번 더 운다.
사랑이 꼭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잖아. 그 사람 때문에 불행해져도 그 불행마저도 사랑하 게 되는 게 사랑이잖아. 아란이 너 안 떠난다.
갑자기 든 생각에 민준은 마음이 놓였다.
안 그러냐? 너같이 성격 드러운 놈한테 당하고 산 게 얼만데 그거 갚기 전에는 못 떠나 지. 제후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얼굴을 들자 민준이 빙긋이 웃었다.
생각해보니 아란이 병원에 있을 때에도 이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너처럼 지극정성인 남자 놔두고 어딜 가겠냐? 도망가더라도 일주일 동안 잠 못 자고 밥 못 먹어가며 고생한 네 은공은 갚고 가라고 그래. 정신 들었으면 얼른 가. 민준은 친구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맘 있을 때 얼른 가서 아란이한테 말 해. 나한테 당하고 산 거 갚을 기회 줄 테니까 조금 만 더 같이 살아달라고 그래. 이왕이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평생 괴롭혀 달라고 그래. 제후가 신발을 신고 뛰어나갔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벌커덩 열린 문을 닫으러 나갔던 민준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복도로 나가 가슴 높이 만큼 오는 벽을 붙잡고 다시 친구를 불렀다.
제후야! 경비실 앞 계단을 벗어나 막 옥외 주차장과 화단 사이의 통행로를 뛰어가고 있던 제후가 먼 시선으로 민준을 올려다본다.
아란이한테 내가 너희 둘 얘기할 때 엿들었다는 건 비밀이다.
알았지?! 제후가 알았다는 뜻으로 손을 흔든다.
민준은 난간 모서리에 팔을 겹쳐 기대며 혼자 중얼거 렸다.
한 번만 더 이러면 내가 네 친구 안 한다, 권 제후. 집 안은 조용했다.
아직 안 왔나? 당연히 아란이 집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후는 텅 빈 공간이 주는 머쓱함에 혼잣 말을 중얼거렸다.
일단 한숨을 가라앉히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멀지 않다.
침실로 들어가자 노란 형광색 불이 들어온 충전기에 꽂 혀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20분 후. 제후는 생명 줄이나 되듯 붙들고 있던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젠장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한 밤이라는 시간과 실례를 무릅쓰고 아란의 친정을 비롯해 수첩에 적어둔 친구들에게 연락 을 취해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물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란을 대할 자신도 제후에겐 없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오빠 사랑해요. 오빠만요. 포기하지 않았어. 나 역시 널 포기하지 않았어, 아란아. 그럼 돌아와 있었어야지. 오빠도 옛날에 사귀던 여자 있었지 않았냐고, 난 그 여자랑 오빠가 같이 잘 만큼 심각한 사 이였던 거 알고도 넘어가줬는데 오빠는 내 어렸을 적 첫사랑도 이해 못해 주냐고 따졌어야지. 지금 사랑하는 건 오빠뿐인데 왜 날 믿지 못하냐고 울면서 대들었어야지. 정나미 떨어져서 정말 헤어진다고 해도 내 눈 보면서, 화내면서 말했어야지. 뛰어나가는 널 잡을 수 있도록, 날 용서해달라고 매달릴 수 있도록. 그런데 어딜 간 거야. 왜 내 곁에 없어. 탕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것에 섞여 차임벨 소리도 들렸다.
권 회장은 무거운 눈을 억지로 떴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겨우 풋잠이 들었던 터였 다.
여보, 일어나 봐요.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지 않아? 옆의 아내를 흔들었다.
눈꺼풀을 움직인 박 여사가 잠을 깨고 조용히 다음 소리가 나기를 기다려 본다.
그렇네요. 근데 이 밤중에 누구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난 그녀는 옷걸이에 걸어둔 겉옷을 걸치고 안방을 나섰다.
그러자 미처 듣지 못했던 빗소리가 우르르 천지를 울리고 있었다.
장마도 끝났다면서 무슨 비가 이렇게 온담. 늦은 여름비를 감상할 겨를은 없었다.
그동안에도 익명의 방문객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 여사의 걸음이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 이봐요, 벨을 눌렀으면 말을 해야아니, 새 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잠을 깨운 사람에게 화를 내려던 박 여사는 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 는 여자를 보았다.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자며느리가 틀림없었다.
아가, 새 아가. 아란아, 아란아! 이름을 부르자 비에 푹 젖은 몸을 일으키며 여자가 문 앞에 섰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숙 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할머니. 아가, 아가. 너 우는 게야? 할머니 손을 눈가로 가져가는 걸로 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래. 박 여 사가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여보 좀 나와 봐요! 아란이, 우리 아란이가 새 아가가 왜? 이미 안방 문을 밀고 있던 권 회장이 현관 인터폰으로 아란을 확인하더니 우산을 챙겨 나간 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비도 오는 한밤중에 혼자 이 곳을 찾아왔다는 것이 노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가. 대문을 열고 나가자 아란은 곧장 울먹이며 우산을 든 권 회장의 품으로 달라붙었다.
할아버지할아버지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 때문에 속상해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아껴주는 어른들 행여 신경 쓰실까봐 참고 참았던 눈물이었다.
오냐, 오냐. 할애비 여기 있다.
왜 우는 게야, 왜 우는 게야 권 회장은 어린 손자며느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오빠가오빠가 그래, 그래. 제후가 뭐라고 하던? 널 속상하게 만들던? 더러워. 순결한 척 고고한 척 세상에 다시없는 성녀인 척 가장하고 다가온 그 얼굴이 그 몸이 더럽고 가증스러워. 그러니 내게 오지 마.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다시는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라고!! 오빠가 권 회장의 소매를 쥐고 있던 아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난 아무 말도 듣지 않았어. 다시는 날 보고 싶지 않다는 말도, 내 눈 앞에서 사라지라는 말도 난 아무 말도 듣지 않 았어. 아가, 아가! 정신 좀 차려보렴. 아가, 새 아가! 아란은 주저앉듯 권 회장의 품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거리를 헤매고 쉴 곳을 찾는 동안 줄기차게 작은 몸을 때리던 빗소리가 아득해지고 세상이 멀어져갔다.
기다렸다는 듯 찾아오는 어둠과 소용돌이치는 환상이 아란을 깊은 잠 속으로 몰고 갔다.
제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서 오라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려 웃고 있었다.
손을 내밀었지 만 닿지 않았다.
봐이렇게 오빠가 잡히지 않는 걸. 그러니까 이건 꿈인 거야. 자고 일어나면 오빠가 날 보고 웃어줄 거야. 헤헤, 장난친 건데 놀랐지? 하면서 웃어줄 거 야.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아주 슬픈 꿈을. 안 나왔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권 회장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연락도 없이 회사에 모습을 비추지 않은지가 사흘이나 됐다고 했다.
점심시간, 손자가 일하 는 부서를 찾았다 들은 말이었다.
예. 핸드폰도 꺼져 있고 집 전화도 받지 않던데요. 집으로는 찾아가봤나? 저, 그게 근방에 사는 직원이 퇴근하면서 들러봤는데 불도 꺼져 있고 사람이 없는 것 같더랍니다.
그 곳 경비 말로도 요 근래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알겠네. 수고의 말을 남기고 권 회장은 맨 꼭대기 층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서들에게 생각 할 게 있으니 전화 연결을 하지 말라는 것을 비롯해 어떤 방문객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사흘. 느닷없이 아란이 찾아와 대문 앞에서 쓰러져 오늘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한 기간과 같은 시 간이었다.
부모노릇 하지 못한다고 장인과 장모에게 아내를 대신해 화를 내던 손자였다.
제 아비 어미 잃어버리곤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손자에게 웃음을 찾아준 손주 며느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노(老) 회장은 키가 큰 빌딩 창가에 붙어 담배를 태우기 시 작했다.
티격태격 마찰이 나도 톱니바퀴 틈 맞추듯 잘 살아가기에 이제 증손주 볼 일만 남았구나, 아내와 앉았다 하면 웃음 짓게 하던 아이들이었는데 복 중에도 그런 복이 없다며 자식처럼, 친손녀처럼 여기던 아이였는데. 회장님? 인터폰이 울렸다.
권 회장이 뒤를 돌아보며 버튼을 눌렀다.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지 않나. 그게 아니라, 손자 분께서 찾아오셨는데요. 제후가? 이 녀석도 양반은 못되는구만. 어쨌든 손자의 방문이 반가운 권 회장이 금방 피운 담배를 뭉개어 껐다.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내가 얘기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고. 문이 열렸다.
야윈 얼굴과 처진 어깨를 하고 인사도 없이 앉는 손자의 모습에 권 회장도 마음이 안 좋았 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게 분명했다.
저 일 그만두겠단 말씀드리러 왔어요. 사흘이나 말도 없이 빠진 놈이 배짱도 좋구나. 내가 사장이지만 네 녀석처럼 책임감 없는 사람은 직원으로 채용할 계획 없다.
제후는 반박을 하지 않았다.
대신 유리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깍지를 해서 턱을 괴고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얘야. . 이번엔 또 무슨 말썽을 피운 거냐? 무슨 말썽을 피웠길래, 아가가 할미하고 나한테 달려 온 게야? 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란이, 아란이가 거기 갔어요? 청담동 집에 있어요? 왜요? 아니, 거기 가 있으면 전화 라도 해주셨어야죠! 제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찾으러 다녔는데 왜 할아버지를 보는 제후의 눈에 원망이 어린다.
묻지 않아도 손자의 마음고생, 몸 고생이 훤히 보이는 권 회장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꾸나. 네가 그 아일 내쫓은 게냐? . 제후는 주먹을 꽉 쥘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집을 나가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만큼 그 아이에 대해 무관심했던 건 아니냐? 사흘씩이나 찾았어도 거처를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네가 잘못했다는 뜻으로 이 할애비가 이해해도 상관없겠냐? 역시 대답이 없었다.
권 회장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힘들면 그만 두거라. 예? 그 아이와 맞춰 사는 게 힘들면 헤어지라는 뜻이다.
너도 너지만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가 고생시키는 거 사돈에게도 미안하고 어쩌면 이 늙은이가 너무 욕심을 부렸는지도 모르겠구나. 할아버지. 내 말 끝까지 들어라. 손이 귀한 집안이다 보니 나나 네 할미나 그 아이를 들이면서 손자 볼 생각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작 너희들 감정은 생각도 않고 말이지. 그런 거 그런 거 없어요! 이제 저희들 할아버지가 걱정하셔도 되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 구요. 아이 얘기를 미룬 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고 좀 더 저희들만의 생활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만한 일로 헤어진 다거나 그런 일 없어요! 제후는 부지런히 변명을 늘어놓는다.
본심을 알고 싶어 찔러본 것인데 손자는 필요이상으로 흥분을 해서 할아버지를 말린다.
그럼 앞으론 내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예. 제후의 몸이 힘없이 소파로 가라앉는다.
담배 생각이 난다.
그거라도 피우면서 마음을 정리 해야만 어떻게든 살 것 같았다.
권 회장이 자신의 입에 하나를 물고 손자에게도 건넸다.
없으면 하나 빌려주마. 원래는 사내 어디에서도 금연이지만 오늘만 허락하는 거다.
제후가 고개를 든다.
여전히 멍한 표정이어서 귄 회장이 농담을 건넸다.
괜찮다.
네 할머니가 알면 건강에도 안 좋은 걸 왜 피냐고 분명 야단을 칠 거라만. 아란이도 그래요, 할아버지. 말문을 열어 겨우 웃음을 보이는 손자가 안쓰러웠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안쓰러운 사람은 아란이었지만. 필터가 반쯤 타들어갔을 때 권 회장은 담뱃불을 껐다.
어디, 얘기 좀 들어보자꾸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희 둘을 맺어준 사람이 이 할애비니까 말이야.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제후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웃음을 섞어 얘기를 하던 회사에서와는 달랐다.
마치 나라를 위해 중차대한 결정을 내리러 가는 사신(使臣)처럼 줄곧 긴장된 표정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주방에서 아란에게 줄 죽을 끓이고 있던 박 여사가 한 달음에 달려 나왔다.
이미 남편의 연 락을 통해 사정을 들은 터, 한바탕 야단을 치려다가 그만 혈육의 정에 무너지고 말았다.
세상에, 내 새끼 얼굴이 이게 뭐냐. 밥은 제대로 먹은 거야? 박 여사는 며칠 새 야윈 제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인다.
손주 며느리는 손주 며느리대로, 손자는 손자대로 안쓰러운 그녀였다.
아란이는요? 방금 전에 정신 들었다.
뭐라도 먹여야 될 것 같아서 막 죽을 끓여 가져가려던 참인데 아, 그렇지, 제후 네가 올라가련? 얼굴도 보고. 그런 자격제후는 웃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자격 저한테는 없어요, 할머니. 아니, 왜? 제가 아란이한테 큰 잘못을 했거든요. 어쩌면 그 녀석, 제 얼굴 보면 놀라서 도망갈지 몰라요. 여기서도 나가버리면 길 잃어버리고 영영 저한테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예끼, 이 녀석! 듣고 있던 박 여사가 손자의 등을 후려친다.
아야! 할머니, 아프잖아요! 얼얼한 등을 만지며 우는 소리를 내는 손자를, 박 여사는 정색을 하고 쳐다본다.
아프라고 때렸어, 이 놈아! 네가 잘못했으면 싹싹 빌어서라도 집으로 데리고 가야지, 언제 까지 여기다 둘 참이야? 이 늙은 할미 언제까지 고생시킬 참이야? 할머니 제후는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렸다.
네 할아버지도 나도 더는 못 받아준다.
살면서 싸움 한 번 안 하는 부부가 어디 있다든? 언제까지 어리광 부리면서 매달릴 게야? 할머니가 야단을 치고 있다.
언제나 응석을 받아주고 뒤치다꺼리하기에 바빴던 할머니가 자신에게 야단을 치고 있는 것 이다.
소원이 이루어졌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야단을 맞고, 잘 한 것이 있으면 칭찬을 듣는 보통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이고 싶었던, 소원이. 제가 잘못했어요, 할머니. 알았으면 다음부터 이러지 마. 그리고 네 집 사람 기운 차리는 거 봐서 데리고 가거라. 예. 제후는 꿇었던 무릎을 세우면서 돌아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오빠? 문득, 계단을 내려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손에 쥐면 부서질 듯 연약한 목소리에 거실에 있던 사람 모두가 그 쪽을 향했다.
그녀였다.
아란아. 공중으로 떠 있던 아란의 발이 다시 거슬러 위로 올라간다.
여윈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난간을 꽉 쥔다.
시선이 닿자마자 눈물이 똑 떨어진다.
이혼 도장, 찍으러 왔어요? 그게 아니야, 난아란아! 아란은 아주 무서운 맹수를 대할 때처럼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한 걸음에 두 개씩, 세 개씩 계단을 뛰어올랐지만 제후가 마주한 건 굳게 잠겨버린 문뿐이었다.
닫혀진 문은 그녀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아란아 문을 두드리려던 주먹이 허공에서 멈춘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쉽지 않을 게다.
죽 그릇을 가지고 따라 올라온 박 여사가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대강은 들었다만 네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거 아니? 세상에 서 제일 무서운 건 믿었던 사람에게서 의심을 받는 거란다.
평상시의 다정한 말투로 돌아온 박 여사는 손자 옆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제후는 기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아요, 저도.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등을 돌려버렸을 때 그 때 받은 상처는 쉬이 낫지 않아. 영영이요? 사람마다 하기 나름이겠지. 다만 이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설사 그 시간이 평생이 된다고 해도 잃어버린 믿음은 반드시 회복해야 된다는 것과 전에 주었던 것보다 더 큰 믿음을 주어야 한 다는 거란다.
그게 가능할까요? 진심은 통하는 법이란다.
힘 내거라. 손자의 어깨를 두드려 준 박 여사는 일어나 문을 노크했다.
아가, 할미가 죽을 끓여왔는데 들어가도 되겠니? 대답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죽 그릇을 손자에게 넘겼다.
잘 해보렴. 손잡이를 돌리자 뜻밖에도 문은 열려 있었다.
제후는 심호흡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란은 커튼이 쳐진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저 말이에요 아마도 방에 들어온 사람이 할머니라고 생각하는 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런 말 들으면 제후 오빠가 화내겠지만 정말 좋아했 던 사람이었어요. 제후는 대꾸를 할 수도 없었지만 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냥 그녀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한서 오빠는 새 엄마가 데리고 온 아들이었어요. 근데 우리가 좋아하는 걸 엄마가 어떻 게 아셨는지 아빠한테 얘기를 해서 오빠를 다른 데로 보내버리셨어요. 원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새 엄마하 고는 말도 안 하게 됐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갔다와보니까 오빠 방이 비어 있더라구요. 전 엄마한테 따지지도 못하고 혼자 방 에서 울기만 했어요. 한서 오빠를 좋아한다고 다시 집에 오게 해달라고 아빠한테는 더더욱 말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 게 있는 사람인 듯 없는 사람인 듯 살다가 대학에 들어와서 제후 오빠를 알게 됐어요. 제후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아란의 말을 기다렸다.
아, 이건 오빠한테도 말 안 했던 건데아껴줬다 놀래켜 주려고요. 있잖아요, 저 신입생 환영회 때 농구하는 모습 보고 첫 눈에 반했었어요. 제후는 숨을 죽인 채 잠잠히 기억을 떠올려봤다.
해장술 내기를 한다며 진탕 취해서 재학생 과 신입생이 편을 갈라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했던 일을. 그랬었구나. 그 때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만나지는 못했어도 저한테는 한서 오빠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 좋아하지 못할 줄 알았어 요. 그런데 제후 오빠에 대한 나쁜 소문들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어요. 언제부턴가 한서오빠 생각도 전혀 않게 됐었 구요. 그래서 한서 오빠보다 더 많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녀가 다음 말을 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에요. 오빠가 저더러 헤어지자고 했어요. 다시 는 보기도 싫다고 그랬어요. . 제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마구 내뱉은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 진심 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녀가 믿어주기나 할지가 의문이었다.
오빠한테 전 그 정도밖에 안 됐나 봐요. 어떤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었 는데. 사랑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어요. 상대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랑은 결국 한 때의 즐거운 감정놀이로 끝나고 말 거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렇게 담담히 상처를 쏟아놓은 아란이 커튼을 옆으로 촤악, 열어젖혔다.
맑게 닦인 유리창 으로 그의 모습이 비치자 제후는 당황했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뒤돌아섰다.
이게 얘기의 전부에요. 오빠가 믿던 믿어주지 않던 상관 안 해요. 다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내가 이 말을 해주는 건다시 잘 해보자는 뜻이 아니라 남이 되기 전 베푸는 마지막 호의이기 때문이에요. 남이라고? 제후의 꽉 쥔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박혔다.
정말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오빠가 그랬잖아요. 우리 결혼 끝낼 자격, 오빠한테만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하는 거에요. 냉정한 태도만 보이면서도 아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그만 끝내요. 아란아. 난 용서했어요. 내 앞에서 다른 여자랑 잤다고 해도 그 여자 손목을 잡고 사라져버려도 끝까지 믿었어요. 그래서 용서받을 줄 알았어요. 왜 내가 숨겼는지, 왜 한서 오빠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지 적어도 나한테 와서 물어볼 줄 알았어요. 물어볼 걸 그랬다고? 좋아, 말 한 번 잘했어! 제후는 방을 가로질러가 아란의 팔을 획, 잡아챘다.
전화 계속 꺼놓고 받지도 않았던 사람은 누군데? 내가 널 찾으러 다닐 동안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숨어 있던 사람은 누군데? 이대로 날 찾지 못하고 돌아서 달라는 것처럼,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으니 나는 필요 없다는 것처럼 숨어버린 사람은 너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어? 엄마가 새 엄마가 찾아왔었단 말이에요! 아란이 소리를 지르면서 잡힌 팔을 뿌리쳤다.
장모님이? 한서 오빠가 날 되찾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대요. 우리 사일 갈라놨으니까 책임을 지라고, 오빠에게서 날 데려올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아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나 그 말 듣고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새 엄마 만나고 집으로 와서 그냥 기다렸어요. 오빠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는데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는오빠는 오지 않았지.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을 뿐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 젠장! 제후는 무릎을 꿇으면서 아란을 와락 끌어안았다.
눈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야위어버린 몸 이 느껴졌다.
새 엄마든, 윤 한서든 다 그게 뭐야! 그 사람들이 뭔데 우리가 휘둘려야 하냐고! 오빠 제후는 아란의 등을 토닥였다.
복수를 할 상대도 화풀이를 할 계획도 지금은 머릿속에 없었 다.
그 만큼이나 싸움에 지친 그녀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약속할게.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함께인 곳에서 서로의 상처를 다독여 주는 것이 먼저였다.
무슨 일이 있었대도 좋아. 우린 헤어지지 않아. 절대로. 널 넘겨주는 일은 없어. 흔들리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잠깐 길을 잃어버렸어도 괜찮아. 너라는 나침반이 있으니까. 아무리 포기하고 싶어도 상처줄 곳도 그 상처를 위로받고 싶은 사람도 같은 사람이니까. 결국 중요한 건 누가 먼저 만났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너를 사랑하느냐는 거니까. 제후는 아란의 젖은 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가자. 우리 집으로. 으응. 아란은 눈물을 훔치고 일어났다.
미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피 어났다.
사흘 만에 돌아오는 집안의 풍경은 난지도의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여기저기 술병은 나 뒹굴고 정체불명의 퀴퀴한 냄새까지 하나도 정상인 것이 없었다.
밥통 속의 밥은 바짝 말라있었고 손도 안 댄 반찬들은 모조리 쉬어 있었다.
고스란히 비를 맞은 빨래들에는 곰팡이가 나 있었다.
마많이 지저분하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치울게. 아란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제후가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빠. 으응, 왜? 맙소사. 그녀는 또 울고 있었다.
왜왜 그래, 아직도 화났어? 그 날 너한테 말 심하게 했다고?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그 런 말 머리에서 다 잊어버려주라. 아란이 고개를 저으면서 훌쩍인다.
아니아니에요. 오빠한테 미안해서 그래요. 나 오빠를 괴롭혀주고 싶었어요. 민준 선배 네 집에서 싸우고 나오면서 어디 나 없이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고 오기를 부렸어요. 엉망으로 부서트리겠다고 나쁜 생각만 했어요. 그럼피식, 웃은 제후가 아란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그럼 목적 달성은 한 거네. 집안도 내 마음도 엉망이 되어버렸으니까. 오빠는나 안 미워요? 그야 조금은 밉지. 그치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만족해. 두 개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용서 해 줄 사람은 너고, 화를 낼 사람도 너야. 사랑받을 사람도 잔소리 해 줄 사람도 너 야. 나한텐 그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 은 아란 밖에 없어. 걸핏하면 징징 울어도 역시 난 너 없으면 안 돼. 널 채우는 건 바람. 날 채우는 건 바람에 지친 너. 사랑해 내가 가는 길의 끝에 네가 언제나 마중 나와 있다.
회색빛 안개에 걸음 멈추어도, 찬 빗줄기 에 몸을 움츠려도 태양은 언제나 구름을 헤치고 나온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너처럼. 사랑해. 사랑해, 아란아. 방학동안 집안에서만 뒹굴었냐? 얼굴이 기집애마냥 뽀얗네. 이 손 치워! 징그러, 임마! 제후는 부비부비 뺨을 문대는 서훈의 손을 쳐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틀린 말도 아니잖냐. 아까 전화통화 할 때 보니까 뜨겁다 못해 아주 활활 타오르더만. 민준이 레슬링을 할 때처럼 제후의 목을 옆구리에 끼고 죈다.
헤드락이다.
안에 여자가 있는데 굳이 나갈 필요가 없지. 그동안 모자랐던 거 보충하기도 바쁠 텐데. 모자랐던 거아란이 본가에 있는 동안 떨어져 있던 걸 가리켜 말하는 모양이다.
사정을 들 킨 제후의 얼굴에 붉은 빛이 올라왔다 사라지고 그렇잖아도 숨이 막혔던 차에, 얼른 민준의 팔을 쳐냈다.
이임마, 시시끄러! 남이사 와이프랑 보충을 하던 말든 니가 뭔 상관이야? 내 말이 맞지? 하는 눈으로 민준이 웃는다.
상관있지. 그럼, 그 일 그냥 입 닦을 생각이었어? 그 일이라니? 니들 나 모르게 뭔 일 있었냐? 서훈이 끼어든다.
민준이 책상에 걸터앉으며 하품을 했다.
대단한 건 아냐. 그냥 부부싸움 하고 우리 집으로 피신 왔길래 잘 타일러서 보냈어. 부부싸움? 이 자식이? 한 사나흘 갔지, 아마.민준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나중에 생각나서 전화해보니까 뭘 어떻게 달래놨는지 아란이 목소리가 배는 나긋나긋해졌더라.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민준의 말을 듣고 있던 서훈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래도 제후 넌 여전히 아사코야. 아사코? 은 아란 말고 딴 여자한텐 얼음 뚝뚝 떨어지니까 아이스(Ice)고, 아란이랑 말할 때 말고 성격 여전히 드러우니까 사이코(Psycho)지. 합쳐서 아이스 사이콘데 너무 기니까 줄여서 아사코라고 부르는 거야. 누가 그런 괴상한 별명을 만든 거야? 내가.서훈이 팔꿈치로 민준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떠냐? 네 생각엔? 딱이네! 동감이다.
친구들이 주절주절 한담을 나누는 사이 제후는 밖으로 나왔다.
한산했던 캠퍼스에는 사람들 로 북적이고 늦은 여름의 햇살은 아직도 따갑기만 하다.
2학기가 시작됐다.
누굴 찾아오셨다고요? 프론트의 여직원은 아란을 보며 말했다.
윤 한서씨요. 지금 자리에 안 계신가요? 선약을 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어, 오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여름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고 아란은 한서를 불렀다.
동료들과 점 심을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던 듯 그의 옆에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아란아. 한서가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더니 동료들과 멀어져 아란이 있는 쪽으로 뛰어온다.
아란은 전공 서적 두 권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기다린다.
어쩐 일이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일러 주시더라. 그래서 학교 끝나고 바로 여기로 온 거야. 나현을 부르는 아란의 말에는 약간의 호감마저 엿보였다.

너 이제 새엄마라고 안 부르는구나. 엄마좋은 분이잖아. 오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 한서가 말했다.
과연, 아란이 말한‘좋은’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서. 그보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아직 점심 전이면 냉면이나 같이 먹으러 갈래? 회사 앞에 잘 하는 데 있는데. 그래, 그럼. 한서와 아란은 대목이라 한창 붐비는 냉면 집을 찾았다.
그래도 용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자리를 보고 잡아 앉았다.
아줌마, 여기 물냉면 둘이요. 주방을 향해 소리치고 한서는 재킷을 벗어 한 쪽에 놓는다.
아란은 그런 한서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손가락 장난을 친다.
오빠 나 그 사람 얘기하러 온 거지? 네 남편. 미리 나온 냉수를 한 컵 비우고 한서가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미루지 말고 해. 나도 사적인 얘긴 줄 알고 사람들 피한 거니까. 응. 아란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깍지를 낀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반짝이며 한서의 눈을 끈다.
아마도 그녀는 저 결혼반지 안에 갇힌 그녀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할 것이다.
오빠 아직도 나 사랑해? 한서가 피식 웃었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찾아가지도 않았겠지. 그 녀석 아주 당차게 나오던데 그 날 무슨 일 없었어? 싸웠어. 헤어지자는 말도 나왔고, 같이 살면서 그렇게 심한 말을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거 같아. 지금은 그 때보다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지만. 말하자면 나더러 이 이상은 끼어들지 말라는 거냐? 오빠를 사랑한 건 사실이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아란은 그녀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이 어깨에 손을 얹을 수 있는 사람, 권 제후 밖에 없어. 그러니까 윤 한서와의 과거는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어. 아란이 너 못 본 사이에 잔인해졌구나. 그런 말 하면 내가 힘들어진다는 거 몰라?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래. 오빠도 그만큼 우리한테 잘못했으니까 그 정돈 당연하다고 생 각해. 난 흔들리지 않아. 잘 살고 있는 사람 들쑤셔 놨으니 책임을 져라? 확인한 셈 칠 거야. 제후 오빠하고 내 사랑이 얼마나 단단한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았 는지 시험을 받았다고 생각할 거야. 음식이 나왔다.
직원이 상을 차리는 걸 도와주고 입맛에 맞추어 겨자 소스를 곁들인 아란이 그녀 앞에 있는 냉면을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르더니 조금씩 입으로 집어넣는다.
한동안 한서도 말없이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얼음 섞인 육수에,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에어컨에 그리고 아란의 이야기에 주변의 공기는 한없이 차가웠다.
제후 오빠 일하는 데로 찾아갔을 정도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 결혼 비정상적으 로 이루어진 거. 그렇지만 정략이니 계약이니 하는 말 우리한테 아무 의미 없어. 하지만 너희들 어차피 사랑 없이 시작했잖아. 정략결혼, 남편과 아내 어느 한 쪽만 마음 바꾸면 가능한 거 아냐? 아니.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불가능해. 시작이 안 좋았다고 해도 결과까지 나 쁘라는 법은 없잖아? 닮았어. 너희들 닮았구나. 국물을 마시던 아란이 한서의 말에 대접을 내려놓는다.
날 바라보는 눈도, 다른 사람을 새기고 닮아갈 여유 따윈 안 주겠다는 말도 정말 똑같 아. 오빠. 그렇다고 널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그 때 내가 아무 말 없이 물러선 건 어른들이 겁 나서가 아니었어. 다만 기다린 거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도 좋을 경제적인 능력을 갖출 때까지, 내 발언권이 무시 받지 않을 때까지 말이야. 지금이라면 가능해. 한서 오빠 우린 아란이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 일어섰다.
그러나 한서가 조금 빨랐다.
우린 안 된다고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그 친구한테 가서 전해. 이걸로 끝났다고는 생각 하지 말라고. 어디에도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야. 오빠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한서가 싱긋, 웃어보이곤 가게를 나갔다.
다음에 또 보자. 가급적이면 이렇게 단 둘이서. 아란의 시선이 뒤를 따라왔다.
한서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파란 불이 깜박이는 횡단보도를 건너서 52층 건물의 회전문 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 두 잔을 마신 다음에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웅크리 던 심장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다.
넌 그 말을 하고 싶었겠지. 이제는 안 된다고, 다시 시작할 가능성은 없다고. 그러니 연인으로서의 윤 한서는 이제 은 아란의 인생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내겐 아직도 너 뿐이다.
나를 두르는 슬픈 그림자 속에는 여전히 네가 머무르고 있 고 넌 아직도 나의 주인인 것이다.
아란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한서는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저녁을 먹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제후는 아란이 한서와 만났던 일을 듣고 있 었다.
못 먹는 감 찔러 보고 도망갈 겁쟁이처럼은 안 보였어. 스물다섯에 벤처기업 사장 할 머 리면 바보도 아닐 테고. http://ccc1.me/naver/839.html 아란이 쿠션을 끌어안은 채로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제후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렇게 의식하는 것 자체가 그 녀석한테 틈을 보이는 일이잖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쪽으로 신경을 기울일 필요도 없지. 날 믿어, 아란아. 아니면 제후가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아니면 네가 흔들릴까봐 걱정되는 거야? 아뇨. 한서 오빠한테도 말했지만 난 이미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번복할 생각도 없어요. 아란은 제후를 보며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됐어. 아란의 손을 잡은 제후가 아기처럼 달콤한 냄새가 나는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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